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setNet1_2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누구보다 못해서가 아니라

기사승인 2020.10.22  14:40:04

아래의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default_news_ad2

- 차철회 목사, 뉴욕 청암교회

   
▲ 차철회 목사, 뉴욕 청암교회

“무조건 남을 이겨야만 하고 뭐든지 일인자가 되는 것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위대한 지도자를 발견하여 나의 지도자로 받들고 그가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더 소중하고 빛나는 일일세.”라고 요나단 왕자가 말했다.” ‘거인들의 인생 법칙’ 중.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은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다윗을 끝없이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자 요나단은 다윗을 세워주고 아버지에게 대항했다. 요나단의 보호와 사랑 덕분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고 역사상 큰 부국강병의 시대를 맞이한다. 요나단은 누구인가? 가만히 있으면 사울의 뒤를 이을 황태자였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과 요나단의 왕좌를 위협할 인물로 판단하고 계속 죽이려 했다. 이스라엘의 원수는 블레셋인데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현상은 교회가 교인 혹은 교회끼리 싸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급격히 변하고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고 조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푼 사랑, 인재를 알아보는 통찰력 그리고 적진에 단신으로 뛰어드는 용맹함(삼상 14장)을 보면 그도 왕이 될 인격과 자질은 차고도 넘쳤다. 다만, 요나단은 역사의 큰 그림을 볼 줄 알았다. 자신도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지만, 현시대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다윗이 더 필요한 지도자라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욕심을 앞세우면 하나님과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요나단은 하나님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주저함 없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물러나는 것을 기뻐한다. 

요나단은 말한다.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현시대 상황에서는 다윗이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남을 인정하고 세워줄 때, 훨씬 위대한 결과가 나타난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왕좌를 자기 것으로 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고 주신 권력을 다윗 죽이는 일에 사용하다가 결국 자신을 죽이게 된다. 그가 다윗을 격려하고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왔다면 이스라엘은 훨씬 위대한 나라가 되고 남북이 분열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모든 것이 안정된 평화의 시대였다면, 포용과 배려 그리고 사랑과 통찰력이 뛰어난 요나단이 다윗보다 더 위대한 성군이 되었을 것이라 상상해 본다.

현재 감리교회의 절망적인 상황을 바라보면서 오래전에 읽은 ‘거인들의 인생 법칙’이라는 책이 떠 올랐다. 과연 총체적 난국의 감리교회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누구일까? 다윗처럼 전투적인 사람일까? 요나단 같은 평화의 군주일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양보하면 내가 그 누구보다 못해서 그렇다는 취급을 받을까 두려워한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나 장로라는 소위 감리교회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길을 앞장서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수없는 설교와 기도로 사랑과 희생과 섬김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영생을 외치는 사람이다. 그런데 양보와 희생과 섬김을 외면한다. 부활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 내가 낮아지면 주님이 높여주신다는 확신도 없다. 십자가 전적인 은혜에 대한 감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타락한 정치인들보다 한 수 위라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말일까?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목사라는 가면을 쓰고 은총을 잊은 채 상대적 우월감과 의로움 교만에 취해 있기는 필자가 훨씬 더 앞에 있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그의 아버지 됨과 가장(家長) 됨에 담긴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을 누가 극복할 수 있을까? 민주인사를 잔인하게 고문을 하고 난 후, 그 피 밟고 신음을 들으면서도 자기 자녀의 학업 걱정을 하는 안기부나 보안사의 고문 기술자들도 자신들이 정의롭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늘 섬기고 낮아지고 희생을 부르짖는 목사가 어찌 그럴 수가?”라는 질문은 나 자신에게 더 혹독하게 물어야 할 질문일 것이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Karl Barth). 이 말이 더 절실하게 들린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일반기사

문화

1 2 3 4
item53

교육

1 2 3 4
item54

미션

1 2 3 4
item55

오피니언

TIMES VIDEO

1 2 3
item61
More Section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