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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닌가

기사승인 2020.10.15  17: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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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정완 목사(꿈이있는교회)

   
▲ 하정완 목사(꿈이있는교회)

BC 605년 여호야김 4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바로 느고와의 갈그미스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후 바벨론은 친 앗수르, 친 애굽 정책을 편 팔레스타인 국가들을 초토화시켰다.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바벨론의 공격 앞에 여호야김은 가볍게 항복했다. 그리고 바벨론의 종속 국가로 정권을 잘 유지하던 여호야김이 3년만에 반 바벨론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로 인해 바벨론의 재침공을 받았는데 이때 다니엘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 몇 사람”(단 1:3)이 포로로 잡혀간다. 소위 바벨론 1차 포로다.

바벨론 1차 포로 후 여호야김이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왕하 24:8) 재위 3개월 만에 여호야긴은 다시 바벨론의 공격을 받았고 예루살렘은 유린당했다. 이때 바벨론 2차 포로가 이뤄지는데 왕 여호야긴을 비롯해서 유대의 상류층 인사를 포함하여 일만명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4:12-16). 이때 선지자 에스겔(겔 1:2)도 있었다(B.C 597).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함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상상할 수 없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바벨론의 이스라엘 포로 백성들에게 예레미야가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이상했다. 바벨론 땅에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렘 29:5)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라는(렘 29:6) 예언이었다. 일상을 살라는 말씀이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렘 29:4~6).

이것만이 아니었다. 비록 포로된 상황이지만 포로로 살지 말 것을 요청하며 다른 가치의 삶을 말하였다. 심지어 그들을 포로로 잡아온 바벨론의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기도하라는 요청이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상상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어떻게 원수된 나라인 바벨론에 살면서 일상을 누릴 수 있으며 더욱이 그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알다시피 우리는 보통 위기와 환난을 만나면 지극히 이기적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더 강력하게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비상 상황으로 전환한다. 당연히 그때 일상은 사라진다. 그런데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요청은 전혀 다른 가치와 삶이었다. 일상을 살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무슨 뜻인가? 일상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오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위기일 때 오히려 하나님의 일상을 살라는 뜻이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목사는 목사답게, 크리스천은 크리스천답게, 교회는 교회답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오히려 더 선명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진짜 위기는 바로 이 같이 하나님에게 속한 모습을 상실하고 세상이 되어버리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진짜 비극이 시작된다. 원수 적국 바벨론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실행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도할 수 없을 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희망이 사라졌다는 뜻이라 고 할 수 있다.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두 세력이 극단적 싸움을 하던 시절 판사는 재판을 앞둔 두 사람에게 서로 기도하면서 합의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거부했다. 기도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때 그들이 섬기던 공동체는 붕괴되었다. 기도할 수 없는 목사, 이기적 기도만 드리는 교회, 기도 없이 건물과 현상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교단이 제대로 설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 우리가 만난 상황이 불안하고 걱정되는 이유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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