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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정의를 생산하지 못한다

기사승인 2020.09.09  20: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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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태수 목사, 성암교회

   
▲ 허태수 목사, 성암교회

과거 미국의 노예제도는 법이었고 노예해방 운동은 불법이었다. 노예제를 합법으로 삼았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정의는 합법적이지 않았다. 미국의 이민법은 불법체류자를 보호하는 일을 불법이라고 한다. 불법체류자를 법에 넘겨 심판받게 하는 것이 정의인가, 숨겨주는 것이 정의인가.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나 민주화 운동, 최근의 촛불시위까지도 법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이유로 처벌과 견제와 비판을 받았다. 이렇게 법과 정의가 일치하지 않음에도 법만 붙들고 있으면 변화하는 정의, 억눌린 정의, 고통받는 정의가 외면당하게 되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사랑이란 가치를 죽이게 된다. 교회나 교단이나 목사나 장로가 법으로만 정의를 세우고자 하면 갈등과 다툼이 쉬지 않는다. 마침내는 법이 조직과 사람을 불태우게 된다.

필자는 한 교회에서만 40년 가까이 살고 있다. ‘가난한 집 제삿날 돌아오듯 한다’는 말처럼, 그동안 수십 번도 더 선거를 겪었다. ‘겪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때는 기웃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모른 체했기 때문인데, 연급이 하급이었을 때는 끼워주지 않으니 모른 체할밖에 도리가 없었고, 밥그릇이 쌓이자 꼭 선거철에만 괜찮은 목사처럼 알량한 대접(?)을 받으며 선거판에 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선거가 끝나면 없는 것처럼 되돌아가는 40년을 살다 보니 어떤 변화나 흐름이 한눈에 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법대로’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준회원 4년 하고 정회원이 되고 감리사를 할 그 무렵까지는 그래도 ‘은혜’로 연회도 하고, ‘은혜’로 감독도 뽑고, ‘은혜’로 회의도 하는 거 같았다. 학연의 갈등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냥 사회 어디에나 있는 일이었지 경계와 배제와 처형(매장)으로 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는 ‘법대로’를 고함치듯 들이대며 목사 장로가 섞여 패를 지어 싸우지도 않았다. 고소와 재판도 별로 구경하지 못했다. 그 ‘은혜’로의 시대가 무덤으로 들어가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이 안산에서 있었던 제28회 총회였다. 그 전 달 9월 25일에 있었던 감독회장 선거에서 K 목사가 당선됨으로 엄청난 시비가 일어났다. 거기서 비로소 ‘법대로’가 등장하고 ‘은혜로’는 퇴장했다.

개인적으로 감리회의 신학과 목회는 ‘안산 총회 이전’과 ‘안산 총회 이후’로 나뉘어야 한다고 본다. 그때부터 감리회는 ‘은혜’로 굴러가지 않고 ‘법대로’ 가 주장되면서 고소와 고발과 재판과 처형이 끊일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산 총회 이후’ 감리회의 영적 흐름이 ‘법대로’로 바뀌자 은혜로운 목사나 장로는 무능하게 되었고, ‘법대로’가 설쳐대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모든 법(대로)은 정의를 생산하지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어떠한 법(대로)도 정의롭지 못하거나 혹은 정의를 생산해내지 못한다. 이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로 보인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결여된 상태에서 치고 나갈 유일한 길이 법(대로) 바깥의 정의(justice outside the law)라는 언뜻 보기에 불가능한 가능성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 그 (불)가능성을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라고 한다.” -'무법적 정의', 테드 W. 제닝스-

필자가 아는 여럿이 감독에도 출마한다고 하고 감독회장에도 나간단다. 그런데 하나같이 선거법이 하 묘해서 웬만한 법 규정 하나둘은 다 어겼단다. 그러니 선거해봤자 또 고소 고발 재판으로 날이 샌다고 하니, 제닝스의 말대로 이젠 법으로 정의를 세우는 일은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 같다.

자고로 법(대로)이란 자연스러운 순리, 쉬운 것, 우리가 쉽게 따를 수 있어야 한다. 법(法)이라는 한자를 보면 물 수(水)에 갈 거(去)로 되어있다. ‘물이 흐르는 대로 간다’라는 뜻이다. 이게 ‘은혜로’라는 전통이고, 제닝스의 ‘무법적 정의’라 할 수 있다. 물처럼, 이런 법(대로)의 보편성과 형평성은 인간 사회와 집단을 건강하게 지탱해주고, 사람을 살리고 질서를 유지하게 하며, 서로 평화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살게 한다. 이게 법의 정신이라면, 우리가 법을 100%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좌절할 게 아니라, 우리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남을 죽이고 내가 살고자 하는 마음 즉 죄의 힘, 사망의 힘에 사로잡혀 사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짓을 멈춰야 한다.

오늘날 신약성서에서 율법으로 번역하고 영어에서 Law로 번역한 이 단어의 히브리어 성서 단어는 ‘토라’인데, 뜻은 ‘가르침’, ‘훈계’이다. 즉 히브리 성서의 가르침이란 말이 신약성서에서는 노모스(nomos), 즉 법(法)으로 바뀌고, 이것이 영어 성서에서 Law, 우리나라 성서에서 ‘율법’으로 바뀌어버렸다. 법(法) 곧 토라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구체적인 가르침이고, 신명기 사관에 따르면 법의 핵심은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법(法)이란 기본적인 법 정신을 담은 가르침을 말한다. 예수님이 이를 계승했고, 바울도 이를 계승했으나 오늘날 우리가 ‘법=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가르침=훈계’을 살리고 일으키는데 쓰지 않고 그와는 반대로 죽이고 도려내는데 쓰는 것이다.

십수 년 ‘법 법’하다가 여기까지 막다른 길에 들어섰으니 이번 선거판에선 ‘무법적 정의’ 곧 ‘은혜’로 감독과 감독회장을 뽑는 게 어떤가? 하나님의 말씀이 토라고, 토라가 법이며, 법은 가르침과 훈계니, 그 정신을 발휘해서 후보자를 받고, 투표하고, 세워서 망가진 감리회를 추슬러 보자는 것이다. 오늘 이 일을 하지 않고 언제 감리회가 바로 서길 바란단 말인가.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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