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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를 다시 읽어야 한다

기사승인 2020.08.13  15: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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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정완 목사(꿈이있는교회)

   
▲ 하정완 목사(꿈이있는교회)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위험한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 수 있다. 가난이 죄가 되었고, 외형적인 것으로 의(義)를 가장하는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요와 성공, 권력과 번영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되었다. 그 같은 것은 교회와 목사들의 설교 안에서도 자연스러워진 경향이 되었다. 더불어 복음은 사라졌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고백은 악세서리가 되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어느 날 욥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모든 재산을 일순간에 도적질 당했고 재앙을 만나 가난하게 되었다. 자녀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고, 욥 자신은 처절한 질병에 노출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의 친구들은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세상의 인과론으로 욥을 몰아붙였다. 사람들의 고난과 아픔, 가난과 장애는 모두 그 사람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이 인정한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일만큼 의로운 사람이었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런 까닭에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 없었던 욥은 하나님께 직접 고소장을 써서 제출했다.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욥 31:35).

알다시피 욥은 정당했다. 하나님이 인정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곤경에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공동번역, 욥 40:8).

욥은 무죄였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욥이 까닭 없는 고난을 당하도록 허용하신 것일까? 하나님이 욥의 고소장을 받고  ‘폭풍우 가운데에서’(욥 38:1) 나타나셨을 때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아예 욥이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일방적으로 대화를 이어가셨다. 시작부터 기막힌 말씀이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38장부터 41장까지 하나님은 꽤 긴 말씀을 하셨다. 그 기막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욥은 놀라운 깨달음에 이르는데, 그것은 회개였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4~6).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처럼 죄가 없는 욥인데 그는 무엇을 회개한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욥의 첫마디에서 찾을 수 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이런 뜻이다. “아,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긴 말씀을 들으면서 욥은 이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 순간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 같은 고통에 두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고통 가운데 두신 이유를 생각하게 됐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신 걸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손상을 입힐 뻔한 이 기막힌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람이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시고, 심지어 하나님 스스로 ‘죄인(?)’이라는 오명을 받으면서까지 욥의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해 말씀하고자 한 것은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욥의 까닭 없는 고난을 통해 모든 고난 받는 자들을 위로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완성하셨다.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의 저주이거나 징계가 아니며, 가난도 죄가 아니다. 더욱이 학력이 낮고 볼품없는 직장과 수입이 시원찮은 것, 심지어 난치병에 걸리거나 장애를 갖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는 잘못된 설교를 해왔다. 가난과 장애를 가진 자들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심지어 우리는 한동안 우리의 비참한 전쟁과 침략의 역사를 두고 죄인처럼 서 있었다. 우리가 침략과 전쟁의 수모를 당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불이익을 당하는 자는 계속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사회적 계층화와 차별화로 더 고통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이제 욥의 메시지를 더욱 전할 때가 됐다. 이 메시지를 전하며 하나님의 평화와 세상과 물질을 넘어서는 가치로 분명하게 살 때가 온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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