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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 공적 거리

기사승인 2020.06.26  18: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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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태수 목사, 성암교회

허태수 목사, 성암교회

아침저녁으로 두서너 시간 걷는 일이 나의 일과 중 하나다. 기도와 묵상 삼아 걷다 보니 관성이 생겨서 저절로 집 밖으로 나가게 된다. 그런데 지난주부터는 밤낮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까닭도 까닭이려니와 관성의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서 잠시 걷는 일을 멈추고 있다. 대신 서고에 서 있는 책 몇 권을 쌓아놓고 읽고 있다.

오늘부터는 에드워드 홀의 ‘숨겨진 차원’과 발터 슈미트의 ‘공간의 심리학’을 읽기 시작했다. 숨겨진 차원에서 홀은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는 ‘밀접한 거리’다. 다음으로는 ‘개인적 거리’가 있다는 것이고, ‘사회적 거리’가 그 세 번째다. 네 번째는 ‘공적 거리’다. 이걸 좀 더 자세히 적었는데, 밀접한 거리는 50cm 미만으로 연인이나 가까운 친구 사이의 거리가 그렇다고 했다. 개인적인 거리는 우호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120cm 이내의 거리이며, 사회적 거리란 회의를 할 때처럼 육성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3m 남짓한 거리이고, 공적 거리는 마이크를 사용해야 하는 연설에 적합한 거리로 3~4m 이상의 거리란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언택트(untact, 비대면 접촉)’이다. 악수와 포옹은 물론이려니와 가까운 ‘밀접거리’에서 빤히 쳐다보는 일도 안된다. 이런 사정이니 친밀감을 표현하기는커녕 ‘친밀감의 표현’ 그 자체가 혐오가 되어버렸다. 혐오는 곧 금기다. 자칫 결혼이나 장례같이 슬픔과 기쁨을 공유했던 일상사가 ‘혐오의 유예’ 상태에서 금기로 전환하는 건 아닌지 두렵다. 이렇게 되면 가족이나 연인은 물론 친구들끼리 어울려 서로 부대끼는 일조차 어려워서 인간 삶의 근본적인 구조가 급진적으로 전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단 사회, 문화, 관습, 자본, 상업에만 그치지 않는다. 종교 특히 교회는 그동안 아주 밀접한 거리감으로 집단화되었다. 그 밀접한 농도에 따라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 연결되었다. 이른바 ‘콘택트(contact)’의 장점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게 현재의 제도적 교회다. 이렇게 소속감과 공동체의 정체성에 따라 그 집단의 위세와 능력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비대면의 세상이 되고부터 그동안 교묘하고도 치밀하게 얽고 설켰던 교회의 조직, 제도, 교리적 밀도는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프레임과 가치관의 액상화 상태인 요즘 앞으로 세상이나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코로나19 이후는 이전과 다르다는 것만 말할 뿐이다.

물론 동물처럼 배타적 영역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19가 인간의 몸속으로 쳐들어온 것은 인간이 먼저 자연과의 거리를 침범해서 바이러스의 생존 근거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람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피차가 존립되고 유지되기도 한다. 슈미트는 그의 책 ‘공간의 심리학’에서 그 이야기를 한다.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원치 않는 물리적 접촉이나 공격, 현재진행형인 위협이나 미래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개체와의 거리가 충분히 유지되어야만 안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숲의 나무들이 수간 거리를 갖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간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데는 전제 조건이 있다. ‘공격,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할 때이다.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부모가 자녀를 학대할 때,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이다. 이때는 다른 개체와 충분하고도 항구적인 거리 두기를 해야 안전해진다. 

오늘 아침, 이 글을 쓰려고 감리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다. 나도 한때 그 판에 붙어서 몇 번의 글을 날린 적이 있어서 애정이 가던 광장인데, 오늘 보니 광장은커녕 ‘개판오분전(開飯五分前)’이다. 종교 권력의 단맛을 빨아먹고 사는 이들의 쓰레기 같은 짓들에 가슴이 찢어질 듯 절규하는 저 밑바닥 소리에는 ‘구조적 청각장애’ 상태가 되었다. 더 나아가 무형의 조직이 그 실체들을 ‘공격과 위협’을 가하는 존재들로 간주하고 있다. 이 마당에 감리교의 ‘공적 거리’를 논하는 것조차 개가 웃을 일이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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