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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을 지내는 방법

기사승인 2020.04.02  14:3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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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태수 목사, 성암교회

   
▲ 허태수 목사

꼭 주부가 아니더라도 좋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살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냉장고는 일반적으로 냉동실과 냉장실로 구성된다. 먼저 냉동실을 열어보라. 검은 비닐봉지가 여러 개 보일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정체 모를 고기가 얼어붙어 얼음인지 고기인지 헷갈리게 할 것이다. 당연히 그게 소고기인지, 돼지고기인지 아니면 닭고기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 봉투 속의 정체보다 더 곤혹스러운 일은 그게 도대체 어느 시절 고기인지 아리송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두와 가래떡 썬 것은 어떨까. 만두는 이미 냉동에 냉동을 지나 이게 만두인지 돌인지 모를 만큼 되지 않았을까. 가래떡은 얼다 못해 빙하처럼 툭툭 갈라져 있을 거고, 이런 것들은 좀체 발견되지 않다가 새로운 것을 넣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존재를 드러내게 된다.  

이제는 냉장실로 한 번 가보자. 공장에서 오래 보관해 먹으라며, 플라스틱에 담아 포장한 식품들이 즐비할 것이다. 플라스틱 생수병, 플라스틱 케첩, 플라스틱 들기름병, 플라스틱 체리 곽 등등 온통 냉장실 안에는 식음료를 포장한 플라스틱들이 넘쳐난다. 심지어 호박마저도 진공 포장되어 채소 칸에 들어앉아 있다. 플라스틱 통에 들어 있는 먹다 남은 오이는 쭈글쭈글해진 모습을 지나 곰팡이가 살짝 피어있다. 어쨌든 냉장실도 대형마트에서 사 온 플라스틱 통들이 가득 앉아 있다.

“오늘날 냉장고는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이다.”

어느 철학자의 말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저장해두고 먹기 때문에 이웃과 나눔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피차 나눌 필요가 별로 없어진 거다. 이웃집의 그 것이 우리 집에도 늘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없는 게 다른 집에 있을 가능성도 없다. 대형마트에 가면 누구나 다 같은 것을 사다가 저장해 놓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과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저 대형마트와 냉장고 사이를 오가면 되는 것이고, 조금 모자라는 게 있다면 새로운 냉장고를 또 하나 들여놓거나, 냉장과 냉동 기능이 분리된 최신형 기계를 사면 되는 일이다. 

냉장고는 이웃과의 관계만 단절케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자신의 건강, 조화로운 몸의 균형도 단절 시켜 고통을 유발했다. 생태의 문제, 재래시장과의 관계 등은 두루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의 생존 중심에는 알게 모르게 ‘냉장고’가 턱 하니 버티고 있다.  

TV에서는 그 집의 살림살이 규모와 경제적 빈부의 가늠자가 냉장고인 양 선전한다. ‘품위 있는 주부는 무슨 무슨 냉장고’라든지, ‘현명한 주부가 선택하는 어떤 어떤 냉동고’라는 광고문구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다수 인생은 부엌의 한 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는 냉장고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 시대의 온갖 폐단이 냉장고에 응축돼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순절이 시작되던 3월 1일, 나는 우리 집 냉장고를 들추어냈다. 그리고 과감히 비워냈다. 아니 비운 게 아니라 냉장고 안에 있던 음식들을 내다버렸다.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는 심정으로 내다버렸다. 코로나19로 세상이 숭숭하기도 하고, 사순절이 되어서 뭔가 나를 털어내야 할 것 같아 고민고민 끝에 나온 궁리다. 지금은 김치 한 통과 하루에 2000cc씩 마시는 생수병만 들어있다.  

냉장고의 폐기, 혹은 냉장고의 용량 축소! ‘냉장고’가 실제 음식물을 담아두는 용기든지, 아니면 인간의 욕망이든지 여기에서 뛰어내릴 수만 있다면 이는, 이 시대 우리에게 닥친 온갖 시련으로부터 당당해질 수 있을 텐데, 저토록 유사종교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거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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