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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며 믿음 길러내요”

기사승인 2020.03.05  01: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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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명의 아이들 돌보는 야마웅 목사 
함께 책임지는 한창욱, 김미혜 선교사

왼쪽부터 김미혜 선교사와 야마웅 목사, 한창욱 선교사. 그들의 기도제목은 언제나 같다. 그리고 언제나 바쁘다. 학사의 아이들을 믿음의 용사로 길러내고 보살피는 데 앞서 늘 기도로 지혜를 구하며 사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22년 전이다. 1998년, 한국의 서빙고동에서 미얀마로 돌아가는 그를 두고 한국의 목사, 장로들은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미얀마의 민족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인레호수교회 야마웅 목사(70)가 22년 전 미얀마 냥쉐 인레호수로 오던 날을 회상하며 말했다.

“한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벗어나기 싫어 고국 미얀마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평일에는 평범하게 일을 하고, 주일에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삶은 모든 것에 만족을 줬죠.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술과 발달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교회에서 대우까지 받았던 서울의 삶을 벗어나 오지와 같았던 미얀마, 사회주의 체제에 머물러 있던 미얀마,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핍박받는 미얀마 지역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야마웅 목사는 90년대 서빙고 온누리교회 외국인예배를 첫 인도했던 목사다. 미얀마 대부분의 기독교 인구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미얀마 친주의 친족인 야마웅 목사는 미얀마에서 신학교를 졸업 후 사역 중 한국으로 오게 됐다. 자녀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1994년도, 김포공항에서 매우 까다로운 외국인 입국 심사를 하던 때였다. 야마웅 목사는 당시 40만 짯(당시 약 100만 원)의 빚을 지고 한국을 온 터였다. 최근에서야 미얀마 민주화로 GDP 성장률이 다소 올라가긴 했지만, 26년 전은 아시아 최빈국 중에 속했던 미얀마에서 생활비를 벌어 자녀들을 넉넉하게 키우기란 힘든 일이었다.

많은 아시아인들이 김포공항에서 입국 거절을 당했던 시절, 야마웅 목사는 한국에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했다.

“모세와 같았던 상황이었습니다. 앞은 홍해와 같은 입국 거절, 뒤는 이집트 군사와 같았던 빚이 저를 쫓고 있었죠. 김포공항에 도착해 표지판도 제대로 볼 수 없어 어떻게 한국 땅으로 가야 하는지, 정신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경찰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안내를 해주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입국심사대 앞이었어요. 다른 외국인들은 깐깐하게 심사를 받고 있었죠. 그런데 저는 별일 없이 허가도장을 받고, 입국하게 되었어요. 그날 입국 거부당한 외국인만 서른 명 이상이었습니다.”

그는 곧 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15명의 미얀마 노동자들과 함께 먹고 자며 생활했다. 그곳에서 야마웅 목사는 미얀마 노동자들과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던 한국의 미얀마인들을 전도해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서빙고 온누리교회에서 미얀마인들의 공장 예배 소식을 듣고 교회에 예배 자리를 마련해줬다. 15명의 예배로 시작됐던 외국인예배는 금세 100여 명의 외국인노동자들이 함께 드리는 영어 예배로 성장했다.

미얀마뿐 아니라 몽골, 중국, 일본, 필리핀, 네팔 등 다양한 국가의 노동자들이 예배를 찾아왔다. 대부분 불교 신자였다. 당시 한국교회에는 각국 별 예배가 없던 때였다. 

“한국에 와서 함께 예배드리던 미얀마 노동자 중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대에 진학하고, 미얀마로 돌아가 사역하게 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미얀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죠. 한국에서의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1997년도에는 빚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도 했죠. 안정된 삶이었어요. 그러던 중 주일 예배 인도 중에 미얀마의 안 믿는 종족들을 위해 사역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됐어요. 순종하지 못했을 때 두렵고 무서웠어요. 하지만 성령의 뜨거움이 임재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되어 미얀마로 돌아왔죠. 그리고 고향에서 1000km 거리인 냥쉐에서 인따족을 위해 사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명 관광지인 만큼 매우 중요한 사역지였습니다.”

1998년, 미얀마로 돌아와 첫 사역은 인따족 마을이자 불교마을인 메찌세익이었다. 표면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됐지만 야마웅 목사는 갖은 핍박을 받아야 했다. 한국에 유학다녀 온 수학 교사로 알려졌던 야마웅 목사에게 자녀를 맡기는 부모들이 많았지만 결국 목사라는 이유로 추방당했다. 하지만 그중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야마웅 목사를 따라 온 인따족 가정도 있었다. 그리고 자녀를 야마웅 목사에게 맡기는 부모도 있었다.

메찌세익에서 추방당한 야마웅 목사는 냥쉐에 기숙사를 마련했다. 학교가 없는 지역이나 학교를 보낼 여력이 되지 않는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 살며 무료로 보살피고 학교를 보내는 삶을 살아내는 사역이었다. 현재까지도 학교를 못 보내는 가정이 많은 미얀마인지라 야마웅 목사에게 자녀를 맡기는 불교 부모들도 많은 실정이다. 지난 16년간 야마웅 목사를 거쳐 간 인따족 학생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워낙 어려운 환경에 대학보다 취직하거나 고향에 돌아간 아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신학교에 진학해 목사가 된 아이도 있었다.

아직도 이어지는 핍박 속에  어려움이 많은 야마웅 목사지만 이제 한국이 그립지 않은 그였다. 점점 늘어나는 인따족들의 성도들 덕분에 미얀마 냥쉐에서의 삶이 행복하다는 그였다.

미얀마 냥쉐=김목화 기자 yesmoka@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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