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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피해자

기사승인 2019.12.11  16: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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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원 목사(한빛교회)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장 6절

 

김태원 목사(한빛교회)

강림절입니다. 강림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어두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빛으로 밝게 비춰주시길 기대하는 때가 바로 강림절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나심을 기다려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 각자가 예수님의 탄생을 만나게 될 때 나의 마음과 생활, 삶이 변화할 것이라는 영적인 기대를 갖고 강림절을 맞아야 합니다. 

이사야 9:6은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예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이 말씀을 통해서 이사야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묘사합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은 누가복음 2:14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보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시는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유는 메시아의 도래로 인해서 우리의 삶에 평화가 임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분열과 갈등이 있을 때, 빛으로 오셔서 그 모든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시는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평화가 임합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완전한 피해자’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완전한 피해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땅에 평화는 요원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피해자로서 오신 예수님 덕분에 성경의 증언과 같이 하나님의 평화가 이 땅에 임했습니다.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입니다. 평생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남에게 해를 주기도 하고 남으로부터 해를 입기도 합니다. 즉 살면서 우리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 있는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이렇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었는가?” 반대로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주로 피해를 받기만 하고 살지 않았나?”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상처를 주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아니었는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대부분의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쉽게 자신을 상처를 입은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어떤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권력을 가진 집단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을 늘 피해자로 생각합니다. 또 사람들은 상처를 준 것, 즉 가해한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 놓고 자신은 알지 못 하는 일이니까 쉽게 그 상황을 잊어버리고는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받는 것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마음에 품고 다닙니다. 물론 항상 상처를 받고 피해를 보는 사람이나 집단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이 항상 상처를 받은 입장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피해의식에 붙잡혀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생존 경쟁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가해를 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땅에 평화가 오려면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첫째로는 우리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가해했던 일들을 기억하고 인정하며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것에 대해서 하나님과 그 피해입은 사람에게 용서를 빌 때,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이 해결되고 평화와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둘째로 평화를 이루는 또 다른 방법은 누군가가 완전한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피해자면 피해자이지, ‘완전한’ 피해자는 무엇일까요? 사람 중에서는 ‘완전한 피해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피해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 과정을 ‘칭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칭의는 가해자 중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혼자 짓지 않습니다. 죄는 항상 그 죄의 대상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항상 그 죄의 피해자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증언은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가해자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칭의를 통해서 모든 가해자들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문을 열어두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가해자들에 의해서 피해를 본 사람들, 피해자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누군가 피해받은 이들의 피해를 보상해주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어야 할 텐데 과연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가해자 중심의 칭의라는 개념에 부족한 것은 바로 ‘피해자’를 위한 사랑과 섬김입니다. 

피해를 본 이들의 피해를 보상하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의 용서와 피해자를 위한 보상을 위해서는 칭의와 성화가 함께 가야 합니다. 칭의만 강조하면 용서와 화해의 과정이 자칫 피해자 중심이 아니라 가해자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으면 무엇이든지 용서해준다’라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무조건적인 용서 뒤에는 그 은혜에 합당한 성화의 과정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이 예수를 진정으로 믿을 때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보상과 위로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완전한 피해자’이신 것입니다. 자신이 피해를 입었어도 보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완전한 피해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저 타인의 가해를 묵묵히 당하기만 하셨습니다. 

그래서 완전한 피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공동체에 임재하시면 모든 갈등과 분열이 봉합되면서 공동체에 평화가 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생 남을 괴롭히거나 남에게 피해를 입힌 적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피해만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리면 맞고, 욕하면 그 욕을 듣고, 침 뱉으면 침 뱉음을 그저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고통과 피해를 당하시면서도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서 9:6에 보면 ‘한 아이가 날 텐데 어깨에 정사를 매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정사’는 ‘통치권’을 말합니다. 즉 이사야서 9:6에 ‘어깨에 정사를 맨 아기’는 ‘통치권을 담당하는 사람’ 또는 모든 ‘책임’을 진 사람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큰 책임을 진 사람들에게 ‘어깨가 무거우시겠어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책임을 지려 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자마자 그들에게 나타난 죄의 결과는 바로 ‘책임 전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어놓고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상대방의 책임이라고 지적하기에 바빴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고 하셨습니다. 

대개의 이방 종교들은 이 희생양에게 ‘성스러움’을 덮어씌우고 희생양을 바치는 그들의 종교적 제의 뒤에 있는 폭력성을 은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아무런 죄가 없던 예수님의 죽음을 포장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 있는 인간의 죄성과 폭력성을 은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죄인처럼 죽으셨고, ‘십자가’라는 아주 폭력적인 방법으로 희생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성서의 증언은 우리 인간들의 욕망이 자아낸 결과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명명백백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낸 폭력성을 극복할 방법을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해자에게 복수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인류 공동체를 파괴하는 복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끊으셨습니다. 

이제 모방적 욕망이 만들어내는 폭력의 사슬을 끊을 방법은 명백합니다. 바로 ‘완전한 피해자’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닮아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자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가해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여서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피해자로서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지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폭력적 욕망의 완전한 피해자가 됨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새로운 삶과 세상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완전한 피해자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구원의 소식입니다. 

이사야서 9: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기묘자요 모사’라고 증거합니다. 기묘자와 모사는 두 단어로 보이나 의미상 한 단어입니다. 기묘자 모사는 ‘훌륭한 상담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훌륭한 상담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바로 경청입니다. 말은 아끼고 귀를 열어 내담자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는 상담자가 바로 뛰어난 상담자입니다. 따라서 이사야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말을 듣기만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갈등과 분열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갈등과 분열의 원인은 원죄에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을 때, 죄는 인간으로부터 ‘사랑의 능력’을 앗아갔습니다. 타인과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인간은 둘 이상 모이면 그 장소가 어디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사회든, 나라든 분열하고 갈등하게 되어있습니다. 

갈등과 분열을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내가 가해한 사실을 기억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공동체에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완전한 피해자를 모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피해자에게 우리의 억울함과 울분을 다 넘기는 것만이 갈등과 분열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입니다. 완전한 피해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사이에 함께 계실 때,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평강이 임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어두운 우리의 삶을 비춰주시길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만 우리의 삶에 완전한 평화가 임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타임즈 kmctimes@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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