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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버나드, 자기 사랑의 단계

기사승인 2019.08.28  14: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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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영성학)

얼마 전 미국의 ‘디디 허쉬’라는 자살 예방 센터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자살률이 타 국가 출신들에 비하여 두 배 정도 높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교회 출석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인데 … 참으로 슬픈 통계였다. 아마 자살을 고려하는 사람들의 심리 중의 하나는 낮은 자존감일 것이다. 이번 주는 자존감 즉, 자기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버나드는 「하나님의 사랑(On the Love of God)」이라는 책에서 신자의 영적 성장에 따른 사랑의 단계를 네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 자신을 위한 자기 사랑. 둘째, 하나님의 은혜를 위한 하나님 사랑. 셋째,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하나님 사랑. 넷째, 하나님 안에 있는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다. 그런데 넷째 단계의 사랑에서 신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이제는 타자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랑은 다른 말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 자신을 위한 자기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버나드에 의하면 육체를 따라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도록”(엡 5:29) 인간 본성 안에 자기 사랑을 심으셨다. 인간은 육체를 따라 지어졌다. 영적인 존재이지만 육체를 입고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육체는 생수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다. 아무리 좋은 물이라도 그릇이 깨지면 그 물은 바닥으로 쏟아져 버린다. 그러므로 물을 위해 그릇을 잘 관리해야 하듯 영혼을 위해 육체를 잘 관리해야 한다. 이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버나드는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고전 15:46)를 인용한다. 

그러나 본성적인 자기 사랑은 자칫 이기적인 사랑과 육체적 사랑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을 버나드는 홍수 때 강을 따라 흐르는 급류가 흘러 넘쳐 제방을 무너뜨리고 방종의 들판으로 흐르는 것으로 비유한다. 한번 제방이 무너지면 누구도 급류의 흐름과 방향을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본성적인 자기 사랑은 자칫 통제할 수 없는 이기적인 탐욕과 정욕의 노예로 이끌 수도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버나드는 새로 지은 제방에 비유한다.

한편,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인간은 물질적 궁핍에 처할 수 있다. 이때 신자는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배울 수 있다. 버나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인색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이해한다.

이제 신자가 그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다 보면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 실천의 동기로 삼아야 함을 배우게 된다. 신자가 자신의 동기에 의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버나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순수한 동기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 합니다.(살전 2:1-11)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필수적입니다 … 그는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 하셨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창조하신 분께서 그것을 지키고 보존하십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고전 13장 3절에서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하였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내 몸을 불태워 내주었는데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니 무슨 말인가? 그것은 숭고한 박애정신이다. 공동체의 칭찬을 들어 마땅한 사랑이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사랑이 없을 수 있다고 했을까? 사랑의 동기가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을 의미한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동기가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은 신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사랑은 나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not from me) 나를 지나서 표현되는 사랑인 (but through me)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낮은 자존감 속에 사는 것 같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젊은이들은 반복되는 취업의 실패로 인해 자존감이 낮을 수도 있다. 생활고로 힘들어하는 노년층은 경제적인 이유로 자존감이 낮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갈수록 외모를 중시하는 우리사회에서 타고난 외모로 인해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하나님은 우리가 본성적으로 우리를 사랑하도록 지으셨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자신에 대한 사랑조차도 고갈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이다. 그런 우리에게 버나드는 사랑이란 우리 자신부터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이번 한주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나아가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해 발산해 보는 한 주가 되면 어떨까?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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