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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참 자유

기사승인 2019.08.21  15: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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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국 목사(평촌교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3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13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4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갈 5:1-15>

 

독일이 통일이 되기 전 이야기입니다. 동 베를린에 살던 개(犬)가 장벽을 넘어 서 베를린으로 망명을 하였습니다. 서독에 있는 개가 동독에서 온 개에게 물었습니다. “거기에는 먹을 것이 없니?” “아니?” “집이 없니?” “아니?” “그러면 왜 망명을 했니?” “응 거기서는 마음대로 짖지를 못해!” 동독에는 언론의 자유가 없음을 풍자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는 “자유, 평등, 박애”였습니다. 이것을 위해 피의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Patrick Henry(1736-1799)가 1775년에 행했던 유명한 연설이 있는데 연설제목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입니다. 이 자유를 향한 열망이 미국의 독립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인간에게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로 불리는 성경인데 그 전체를 꿰뚫는 핵심 단어는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1>의 말씀이 주제가 되는 성구입니다. 성경 속에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자유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유가 들어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자유를 철저하게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7:24>에서 절망하며 탄식하던 바울은 <로마서 8:1-2>에서 ‘희망과 환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두 가지 자유입니다. 하나는 ‘free from’이고, 다른 하나는 ‘free for’입니다.

1. 속박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

20세기가 낳은 사회학의 거장 에리히 프롬(Eric Fromm, 1900-1980)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라는 책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이 글에서 Fromm은 현대인의 實存을 한마디로 ‘부자유한 存在’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게 태어난(born free)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부터 도피(逃避)’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을 부자유로 몰고 가는 가장 큰 요인은 ‘밖으로부터 오는 위협들을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그 운명 속에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내던지는 포기’라고 말했습니다. 잃어버린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외적인 위협과 그 위협에 운명을 맡겨버린 인간이 과감히 그것들로부터 떠나 ‘생각하는 주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이성’을 회복하는 때에 자유는 다시 주어진다고 그는 설파합니다. 그러기에 그의 자유는 “free from”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먼저 말하는 자유도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였습니다. 당시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이미 자유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여 전한 유사 복음에 매혹되어 그것에 자신을 다시 매몰시키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유대교 율법과는 관계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팔레스타인에서 온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유대교 율법 중 일부를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할례’가 그 대표적인 규례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유의 복음’보다는 ‘유대교의 율법’을 가르치기에 열을 올렸습니다.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발원된 자유의 진리를 선포하기 보다는 육체적 행위를 규정하는 법률 조항과 습관과 전례를 강조하였습니다. 동기는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겠다는 순수한 것이었으나 지나친 형식과 규례를 강조함으로 오히려 복음의 본질이 왜곡될 위기에 처한 셈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프롬처럼 갈라디아 교인들의 부자유는 ‘복음 아닌 것’, 즉 ‘율법에 자신들을 예속시켜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것’이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때로는 이단을 파문할 때 사용하는 ‘저주’라는 단어는 사용하면서 분노하고, 때로는 연민의 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의 본질을 다시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유란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것은 “free from”이었습니다.

 

2. 섬기는 종이 되는 자유(free for)

Eric Fromm은 자유를 ‘인간을 위협하는 모든 속박(종교까지도)과 그 속박에 자신을 내맡긴 포기로부터 과감히 인간을 생각하는 주체로 회복하는 때 생겨나는 그 무엇’으로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생각하는 주체로 바꾸어 놓는가?”라는 질문입니다. Fromm은 이 질문에 대하여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라는 말로 대답합니다. 사랑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것이기에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기술의 미숙성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프롬이 제시하는 자유론과 결별합니다.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속박으로부터 생각하는 주체로의 轉換은 ‘사랑의 기술’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락과 함께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사랑의 예술마저 타락한 사랑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을 자유하게 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신앙의 비약과 역설로 자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Fromm 말하는 ‘사랑의 기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는 때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되는 그 때, 하나님은 인간을 비로소 ‘의롭게 여기시는’ 은혜 안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바 되는 순간부터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Fromm의 한계를 극복하는 또 다른 놀라운 차원을 소개합니다. Fromm은 인간이 창출하는 최고의 가치인 ‘사랑의 기술’에서 자유의 완성을 모색하지만, 바울은 ‘사랑의 기술’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섬김’에서 자유의 完成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free from’은 ‘free for’로 이어져야 진정한 자유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바울로부터 가장 깊은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는 그의 3대 논문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갈라디아서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때문에 그 무엇에도 예속되지 아니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사람을 섬기는 충성스런 종이 되었다.”

여기에서 바울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자유는 인간이 쟁취하는 그 무엇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자유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힐 때 비로소 ‘죄와 율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명예와 성공의 욕망’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곳에서 자유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 후반부에서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굳건하게 서서"라는 말은 '계속해서 서 있으라!'라는 뜻입니다. 서 있다가 주저앉았다 하지 말고 꿋꿋하게 서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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