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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수 주님 전에 거할 사람 忠厚廉潔

기사승인 2019.08.16  09: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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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대선 목사(영파교회)

1  誰堪留帝所? 誰堪居靈山?   2  其惟行善者 心口無欺謾 
3  旣無讒人舌 又無惡心肝       處世惟忠厚 克己待人寬 
4  見惡避若浼 見善共相歡       一言九鼎重 得失非所患 
5  不將重利剝 不作貪汙官       行善邀福澤 長如磐石安
 
1 뉘 있어 야훼 처소에 머물 수 있을까? 뉘 있어 거룩한 산에 거할 수 있을 까?
2 오직 선에 힘쓰며 마음과 입술에 거짓이 없는 이
3 혀로는 남을 헐뜯지 않으며 마음으로 악을 품지 않으며
   사람을 대함에 신실하고 후덕하며 자기를 절제하고 이웃에겐 넉넉하여
4 악을 보면 더러운 양 피하며 선을 보면 함께 기뻐하며
   언행을 중히 여겨 지키려 힘쓰고 얻고 잃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5 높은 이자로 남을 벗겨먹거나 부패한 탐관노릇 하지 않는 이
   선을 행하여 복이 찾아오니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오래일 것이라
<한시원본 : 오경웅의 ‘성영역의’>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머무는 것을 누가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온통 인생을 꿰뚫어 비추는 거룩한 빛 앞에 감히 나설 수 있는 삶이 있을까 마는 시인은 조심스레 하나님 전에 나아갈 덕성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덕성들의 기반이 바로 극기克己이다.

이 시편의 제목처럼 신실하고忠(충) 관대하며厚(후) 청렴하여廉(렴) 깨끗한潔(결) 사람이라는 의미는 결국 자신을 잘 다스려 바른 예로 돌아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예란 어떤 의식이나 행위의 절차로 해석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진리에 젖어들고 그 기쁨에 취함으로 자연스레 밖으로 솟구쳐 나오는 행위이다. 내면에 가득한 진리가 밖으로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이 곧 예이다. 이럴 때 예는 단순한 형식에 머물 수 없다. 사실 차와 형식 등의 여러 조건은 사회관계가 낳은 결과일 뿐이다.

공자는 극기의 의미가 인仁의 회복이며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는 언명으로 압축한다. 극기는 예수님의 언어로 말한다면 자기 부인이겠다. 자기 부인의 텅 빈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

어느 선비가 말하였다. 힘써 구할 것이란 하나밖에 없으니, 곧 자기를 버리는 것뿐이다. 낙타와 같은 네 자아가 점점 작아져 마침내 무가 되면, 바늘구멍은 차라리 공활한 하늘이 되리라고. 이를 행하는 사람은 자연 겸손이 따르게 되고 타인을 선히 대한다. 극기는 결국 ‘자기를 닦아 이웃을 편안하게 하는 것’ 修己安人(수기안인)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이 없다면 결국은 꾸밈이다. 꾸밈은 위선僞善을 낳을 수밖에 없다.

4절의 일언구정一言九鼎은 말의 무게를 소중히 여긴다는 성어成語이다. 정鼎은 제물을 삶기 위한 기물로 세 개의 다리와 두 개의 귀를 가진 그릇이다. 중국 고대 하夏나라의 우왕이 만든 기물器物을 구정이라 하는데 중국 전체를 상징하는 구주九州를 뜻하였다. 하夏, 은殷, 주周 3대에 걸친 보배로서 임금의 덕德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왕조가 바뀌는 것 즉 천명天命이 옮겨간 것을 이 그릇이 옮긴 것으로 비유 하였다. 자신의 말을 소중히 여겨 그것에 책임을 지려 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말함에 있어 그만큼 신중하다는 뜻이 먼저이다. 잘못된 말을 뱉어놓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것 또한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사기』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모毛 선생이 초楚나라에 가자 조趙나라의 국위를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 더 무거운 것으로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백만 대군보다 강하다고 하였다.’ 毛先生一至楚而使趙重於九鼎大呂(모선생일지초이 사조중어구정대려)는 일화가 있다. 같은 절의 득실비소환得失非所患은 황종희의 『송원학안宋元學案』에 ‘대장부 일을 나섬에 있어 바른가 그른가를 생각하지 이익인가 손해인가를 따지지 않는 법이며 하늘에 뜻을 따르는 것인가 거역하는 것인가를 논하지 일이 성공할까 실패할까를 염려하지 않으며 이 일이 만대에 선한 영향력을 끼 칠 것인가를 생각하지 이 한 몸의 부귀영화를 추구하지 않는다.’大丈夫行事 論是非 不論利害 論順逆 不論成敗 論萬世 不論一生(대장부행사 논시비 불론이해 논순역 불론성패 논만세 불론일생)고 하였다.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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