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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칼리아에 나타난 사랑과 겸손의 훈련

기사승인 2019.07.11  09: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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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영성학)

필로칼리아의 저자들에 의하면 신자들이 마음의 고요인 무정념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랑과 겸손의 덕을 쌓아야 한다. 왜 사랑이나 겸손의 덕이 무정념에 이르게 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선한 생각을 품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성 탈라시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은 선한 것으로 채워집니다. 덕은 선한 생각을 낳고, 계명은 우리를 덕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덕의 실천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에 의존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 대해 선한 생각으로 채워진다고 말한다. 사랑의 덕은 선한 생각을 낳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삶을 살라고 명하시는데 그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덕을 쌓게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덕을 쌓아가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결심에 달려 있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은 언제나 이웃을 좋게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사람은 질투심으로 이웃을 대할지도 모른다. 성 탈라시오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웃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지성은 항상 이웃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세력 아래 있는 지성은 이웃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돌아온 탕자」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하루는 내가 대중 앞에서 좋은 강연을 하게 되었다. 그때 동료가 다가와 축하의 악수를 하였다. 하지만 나는 느꼈다. 미소지은 그 동료의 손끝이 진정으로 나를 축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 후에 그 동료가 멋진 강연을 했고 나도 다가가 축하의 악수를 했다. 그 친구는 몰랐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내가 진정으로 축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우웬은 늘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던 그가 유럽 방문 중 렘브란트가 그린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을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의 가련한 영혼이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발견하였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품이었다. 그렇다! 만약 우리가 이웃에 대해 여전히 질투심을 느낀다면 우리는 사랑의 미덕을 부지런히 쌓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 탈라시오스는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나아가 사랑의 덕을 실천하는 사람은 이웃과 세계를 넘어 하나님에 대한 선한 갈망으로 채워집니다. 거룩한 사랑에 의해 활력을 얻은 지성은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들을 배양합니다. 그러나 이기심의 자극을 받은 지성은 악한 생각을 낳습니다.”

왜 이웃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선한 갈망으로 채워질까? 자신의 사랑이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도나무 비유처럼 사랑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not from me),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랑이 나를 지나 표현되는 것(but through me)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선한 갈망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들이 배양되면 결국 하나님과 일치하게 된다. 하나님과 일치하면 세상과 일치하게 된다.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영성가의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머튼은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하면 세상과 일치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디에 관심이 있으실까? 세상의 아픔과 고통일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일치한 우리도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

이처럼, 이웃에 대해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의 내면은 선한 것으로 넘치게 된다. 이것은 마치 병 속에 들어 있는 물과 공기 같은 것이다. 물이 차면 찰수록 공기는 병 밖으로 빠져나가고 물만 가득 차게 된다. 우리의 내면이 선으로 차오르면 악은 저절로 우리 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덕의 실천은 우리로 하여금 무정념의 복을 누리며 살게 한다. 

필로칼리아에 나타난 무정념에 이르게 하는 또 다른 덕은 겸손의 덕이다. 시나이의 필로테오스는 ‘맑은 정신에 관한 40개의 글’에서 겸손의 덕을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주 안에서 정신을 지키려 한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크게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겸손하게 하기 위한 모든 수단을 추구하고 실천하면서 통회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을 겸손하고 통회하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서 과거의 생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 청년 시절부터 지은 모든 죄를 기억하는 것도 마음을 겸손하고 통회하게 만듭니다. 만일 정신이 그러한 죄들을 조사한다면, 과거의 죄를 회상하는 것은 항상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게 하며 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게 합니다.”   

신자가 지난 삶 속에서 지은 자신의 죄들을 기억한다면 겸손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게 한다. 그 결과 영적으로 가난한 마음은 하나님의 자비 외에 아무것도 구하지 않기에 청결한 마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주님의 명령이자 동시에 무정념에 이르는 거룩한 덕이 된다. 시나이의 필로테오스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므로 겸손을 거룩한 덕, 주님의 계명이요 옷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본보기들을 염두에 두고서, 이 고귀한 덕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위에서 언급했던 구제책들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에 의해서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과 몸, 정신, 소원, 말, 생각, 외모 등 안팎이 겸손해야 합니다.”

신자가 이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통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는 계명을 따를 때 그는 무정념의 축복을 경험하게 된다.

갈수록 사랑과 겸손의 미덕을 갖춘 사람을 보기 어려운 것 같다. 이번 한주 사랑과 겸손의 덕에서 조금 더 자라기를 다짐해 보는 한 주가 되면 어떨까?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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