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setNet1_2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필로칼리아에 표현된 죽음 묵상 훈련

기사승인 2019.06.19  15:12:48

공유
default_news_ad2

- 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영성학)

동방정교회의 영성에 관한 서적들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떠오른다. 책의 앞부분에 수도자들의 수도생활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있는데 한 수도자가 자신의 수도실에 해골을 쌓아 놓은 사진이다. 해골들 옆에서 평온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왜 죽은자들과 함께 수도를 할까? 필로칼리아에 나타난 수도자들은 한결같이 욕망, 근심, 잡념, 과거의 기억의 활동들에 의해서 영적 정진에 방해를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생각의 활동들을 가라앉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죽음을 명상하라고 조언한다. 성 헤시키우스(Hesychius)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끊임없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몸과 영혼을 훈련하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자신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항상 죽음을 그려 보아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숨을 거둘 임종의 장소 및 그와 관련된 것까지도 그려 보아야 합니다.”

성 헤시키우스는 여기서 죽음은 우리 자신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게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현재와 죽음 사이에는 수많은 것들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먼저, 우리가 더 이루기 원하는 욕심들과 이미 이룬 것들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근심들이 있다. 예수님은 그것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잘 보여 주셨다. 수고하여 얻은 풍성한 곡식을 잘 먹고 누려야 하는데 혹시 그렇게 하지 못할까 봐 부자는 전전긍긍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런 부자에게 주님은 꿈에 “내가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깨우쳐 주신다. 창조주가 정한 죽음의 법칙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이처럼 죽음을 명상하며 시간을 뛰어넘어 우리의 죽음의 순간에 머무를 때 우리는 죽음과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된다. 죽음과 현재 사이의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 헤시키우스는 우리가 숨을 거둘 임종의 장소 및 그와 관련된 것까지도 그려 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죽음에 대한 명상에 대하여 시나이의 필로테오스(St. Philotheos of Sinai)는 「맑은 정신에 관한 40편의 글」에서 죽음을 삶의 동반자로 삼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다. 죽음과 함께 자고 함께 이야기 했다고 말한다.

“나는 이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의 장점을 경험하고서 영적으로 크게 상처를 받은 동시에 크게 기뻤기 때문에, 그것을 내 삶의 동반자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의 권위와 사랑스러움, 겸손함과 회오의 기쁨, 그것에 충만한 깊은 생각, 장차 임할 심판에 대한 염려, 삶의 염려에 대한 의식 등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이 아담의 딸-죽음을 기억함을 동반자로 삼아 함께 자고 함께 이야기하며 그에게서 육신의 옷을 벗어버린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죽음을 아담의 딸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 이유는 죽음이 아담의 범죄로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 아담의 딸의 권위와 사랑스러움에 대하여 논한다. 죽음이 왜 권위가 있을까? 죽음의 두 가지 차원 때문일 것이다. 첫째, 죽음의 불가피성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창조주가 정한 법칙이다. 둘째, 죽음의 순간에 대한 불가지성이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 수 없는데 그것이 피조물의 한계이다. 그래서 죽음은 권위가 있다. 그런데, 그 죽음에 대한 묵상은 기도자를 겸손과 깊은 사색으로 이끌기에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죽음은 사랑스러운 삶의 동반자로 삼아 함께 자고 이야기하며 지내야 할 인생의 스승이요 친구인 것이다.

더 나아가 죽음을 묵상할 때 우리는 활기를 느끼고 긍정적인 덕이 자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Hesychius of Jerusalem)는 「테오둘루스에게 보낸 맑은 정신과 기도, 그리고 영혼 구원에 관한 글」에서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하다면 항상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죽음을 생각하면 모든 염려와 허영심을 몰아낼 수 있고, 정신을 지키며 항상 기도하고, 육체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실질적으로 모든 활기차고 활동적인 덕이 그것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다면 호흡을 하듯이 항상 죽음을 생각하십시오.”

예루살렘의 헤시키우스는 일상생활의 모든 활기차고 활동적인 덕이 죽음에 대한 명상에서 온다고 단언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자신의 죽음을 명상하는 순간 모든 염려와 허영심을 몰아낼 수 있고, 죄를 미워하고 정신을 지키며 항상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기심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만 추구하는 이타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내 삶의 마지막으로 여기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죽음을 우리 삶의 최고의 선물의 하나로 정의하였다. 죽음을 명상할 때 기도자의 내면에서 물컵 속의 먼지처럼 끊임없이 활동하는 욕심, 근심, 일상적인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은 컵 속의 먼지가 가라앉듯 잠잠히 가라앉는다. 어떤 욕망이나 염려도 죽음의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사색은 사색자로 하여금 자신의 현실을 초월하게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죽지만 그런 평범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에 ‘죽음이 없는 죽음’(The death without a death)를 맞이한다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죽는데 ‘죽음이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죽지만 허무나 두려움 또는 미련 같은 죽음의 감정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만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웰 다잉(Well dying)에 관심이 많은 시대에 이번 한주 죽음 묵상을 통해 ‘죽음이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연습해 보는 한 주가 되면 어떨까?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일반기사

문화

1 2 3 4
item53

교육

1 2 3 4
item54

미션

1 2 3 4
item55

오피니언

More Section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