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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mlet」 햄릿 거기 누구냐? ⑦

기사승인 2019.06.19  14: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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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범 목사(갈릴리교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1-6)

아담의 운명이 뒤바뀌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길을 알려주시는 주님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목마르고 헐벗을 때에라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가 그 길에 예비 되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라고 외친 햄릿의 무거운 짐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도 미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갈등과 절망이 사라진 인간의 삶은 은혜 안에서 새롭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저는 유년시절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을 때면 마음이 무척 설랬습니다. 그 가운데 ‘저 들 밖에 한밤중에’를 가장 좋아합니다.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양 틈에 자던 목자들 천사들이 전하여 준
주 나신 소식 들었네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고대하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 땅에 나신 소식은 까맣게 타들어간 새벽녘에까지 번져갔습니다. 빛을 두른 천사들이 빈들에서 밤을 지새운 목자들에게 나타나 이스라엘 왕이 나셨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탄생 이야기는 소박하지만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것이 놀랍습니다. 인생 대부분을 들에서 밤을 지새우며 온갖 애환을 집어 삼키고, 또 그것을 눈물 속에 묻어야 할 목자의 심정을 조금은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난 목자들이 꼭 에덴을 떠나온 아담 같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오던 동산을 떠나 인간의 무대 한복판에서 넘어지고 또 다시 일어났을 아담을 생각합니다. 빈들에서 새벽을 지새우며, 고뇌했을 한 사람 아담을 생각합니다. 아담이 들녘의 목자들처럼 길 위의 인생으로 살다가 구주 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아닌지 말입니다.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들판은 부침浮沈의 장소였지만 구주를 만난 후 들판은 새로운 에덴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거기 누구냐
다시 「햄릿」입니다. 종교의 변혁과 정의하기 어려운 사조思潮를 지나던 햄릿에게 고뇌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햄릿」이 아버지의 혼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에덴을 떠나온 아담에게도 들녘이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선택지였습니다.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던 장소였습니다. 무언가를 선택하기 어렵고 결론은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신속히 결정했더라도 항상 위험은 따릅니다. 장고 끝에 내린 결정에도 악은 스며듭니다. 한 치도 전진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시작을 통해 유한한 인간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거기 누구냐?
너는 누구냐고 묻는 질문 앞에 인간은 속절없이 무너질 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가졌습니다. 햄릿과 아담처럼 더 이상 고뇌하지 않아도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여전히 내 삶은 한밤중의 목자들처럼 캄캄하더라도 이미 환한 빛은 비춰졌습니다. 우리가 걸어갈 생명의 길이 저 동녘 빛 속에 어느새 속살거립니다.      <끝>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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