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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인 영성훈련들(1) 홀로 있음의 훈련

기사승인 2019.04.23  03:3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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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영성학)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개신교 영성신학자의 하나인 리처드 포스터는 오래전에 「영적훈련과 성장」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지금도 가치 있는 책이다. 필자가 리처드 포스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는 기독교 영성 전통의 다양한 기도 방법들과 훈련들을 연구한 후에 그것을 개신교적인 상황에 맞게 적용해 왔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필자도 지향하는 방향이고 확신이다.

안타깝게도 개신교의 영적 유산들은 아쉬움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웨슬리도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의 매뉴얼을 남기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영적 유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것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지혜로운 접근이 아니다. 그것은 서양인 영화배우의 양복이 멋지다고 수선 없이 그대로 걸치고 다니는 모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의 형편에 맞게 옷을 재단하여 입어야 할 것이다. 기도의 방법이나 영성훈련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도록 적용해야 할 것이다.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훈련과 성장」에서 영성훈련을 크게 내적인 영성훈련, 외적인 영성훈련, 그리고 공동체의 영성훈련으로 구분하였는데 내적인 영성훈련부터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번 주는 내적 훈련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홀로 있음의 훈련’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SNS 문화에서 우리는 공간적으로 홀로 있지만 마음으로 홀로 있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장소라기보다는 마음과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 내적 주의 집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이 많거나 적은 것은 이 내적 주의 집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를 들면, 통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에서도 홀로 있음은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마음의 홀로 있기를 할 수 있다. 홀로 있음은 사람들에게서 떠나 있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보다 더 잘 듣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고요함과 홀로 있기의 목적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기 위함이다.

홀로 있음은 말 없음을 가져 온다. 왜 우리는 말을 많이 할까? 가장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내 뜻을 설득시키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부당한 비난을 받던 중세의 수도사가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개가 말리려고 걸어 둔 융단을 물어 뜯고 있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저것이 네 명성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를 신뢰하면 내가 너의 명성을 지켜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때 이단으로 오해 받기도 했던 이용도 목사는 자신의 호를 시무언(是無言, 말 없음이 옳다)이라고 지었다. 우리가 말을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오해를 풀어 주기 위해서나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나 또는 말로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 없음은 내가 말로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뢰를 의미한다.

우리는 고요함과 홀로 있기의 훈련을 통하여 언제 말을 해야 되고 언제 말을 하지 않아야 되는지를 배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전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게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쉽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고요함의 훈련을 통과한 사람은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때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홀로 있음의 또 다른 유익은 나침반의 바늘처럼 우리 삶의 방향을 가리켜 준다. 홀로 있음을 통한 마음의 고요는 우리가 현재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우리의 가는 방향을 재정립시켜 준다. 더 나아가 홀로 있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진정으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 준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홀로 있기가 없이 친교를 원하는 사람은 공허한 말과 감정에 빠진다. 그리고 친교 없이 홀로 있기를 구하는 사람은 공허한 깊은 수렁과 자기도취와 절망에 빠진다”고 하였다. 20세기 동안 가장 영향력 있던 영성가의 한 사람이었던 토마스 머튼은 “홀로 있기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나의 형제들에 대하여 보다 많은 애정을 가지게 되었다… 홀로 있기와 고요함은 나의 형제들을 사랑하되 그들의 말에 의거하여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에 의거하여 사랑할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라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우리가 홀로 있으면 세상의 고통과도 일치하게 된다. 홀로 있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일치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악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자신이 세상과 단절된 깊은 수도원에서 오히려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마음으로 그는 세상을 향해 글을 썼고 그의 글들은 심금을 울리는 글들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홀로 있음을 실천하다보면 때때로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이 영혼의 밤에 대해 강조한 사람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다. 이 영혼의 밤이란 쉽게 말하면 “성경 말씀이나 예배 또는 설교가 감동이 되지 않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영적인 감정도 메마르고, 하나님께 이르지 못하는 것 같고, 길을 잃은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진정한 고요함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 자신의 행위를 제거하시며, 결국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자유케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오한 일이 우리의 영혼에 발생하기 위해 먼저 몸과 마음과 정신의 모든 산만함이 가사 상태에 놓여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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