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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 대한 초기 사막 교부들의 교훈(4)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깊은 기도의 상태

기사승인 2019.03.13  16:4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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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영성학)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이번주는 에바그리우스에 대한 마지막 교훈으로 깊은 기도의 상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 싶다. 지난주에 말한 대로 깊은 기도의 상태에 이르려면 무정념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무정념의 상태란 잡념의 활동에 방해를 받지 않는 맑은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 상태에서 기도자는 참된 기도를 드리게 되는데 그러한 기도를 통해 특별히 두 단계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첫 단계는 피조물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사물의 내적 본질들에 대한 지혜를 얻는 것이고 다음 단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럼, 왜 자연의 내적 본질에 대한 묵상을 먼저 해야 한다고 말했을까? 세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자연은 누구나 좋아해 자연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쉽게 생각을 몰입하게 해 준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수도의 길에 들어 선 초보자들에게 먼전 자연 묵상을 통해 묵상훈련을 시작하게 하였다. 둘째, 평소 소홀히 여겼던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하는 자연의 오묘함을 깊이 깨우쳐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도 넓히는 것이다. 그래서 잠언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교훈을 얻을 것을 강조한다. 셋째, 자연을 아름답게 돌보시는 창조주를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영성가들은 창조주가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주셨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책은 성경이고 다른 책은 자연이다. 특별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모든 미의 근원인 하나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피조물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자연스럽게 기도자로 하여금 두 번째 단계의 묵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묵상으로 이어지게 하는데 이에 대해 에바그리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조물의 내적 본질에 대한 관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덕을 실천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그것들에게 존재를 부여해 주신 로고스에 대한 관상으로 나아갑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피조물의 내적 본질에 대한 관상(깊은 묵상)을 획득하기 위해서 먼저 덕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깊은 묵상의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 덕을 실천해야 할까? 이것은 특별히 서방 가톨릭교회에서 강조하는 영성신학의 두 측면인 수덕신학과 신비신학의 영성전통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수덕(修德)신학이란 덕을 쌓아가는 단계의 영적 훈련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 하나님과 일치하는 신비신학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럼, 왜 먼저 덕을 쌓아야 할까? 두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덕을 쌓을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하는 죄악으로부터 점차 해방되고 무정념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의 덕을 쌓으면 우리는 시기심을 덜 느낄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시기할 만한 일을 만나도 우리의 생각은 잘 요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둘째, 덕을 쌓은 만큼 우리의 성품은 거룩해지게 되는데 우리는 거룩해진 만큼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나아가 그분의 뜻과 일치하게 된다.

첫 단계의 관상에 이른 기도자는 피조물에 대한 지식에서 이제 기도의 마지막 단계인 신적 지식의 관상에 이르게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자가 깊은 기도의 두 번째 단계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관상까지 나아가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만약에 지성이 피조 세계에 대한 관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의 세계를 완전하게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지식에 머물러 있고, 그것들의 다양성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지식은 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돕는 자로 지성의 이지적 능력을 일깨워 신적 지식의 관상을 하게 합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기도자는 천사들처럼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며 삼위일체를 관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에바그리우스에게 기도는 이처럼 사물과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인식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내적 경성을 통해 무정념에 이른 기도자는 순수한 지성의 활동에 의지하여 사물의 내적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나아가 기도자는 사물의 내적 본질을 넘어서 창조주에 대한 관상을 통해 궁극적 진리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에바그리우스가 내적 경성을 ‘마음에 관한 학문’(science of the mind)라고 부른 이유다.

기도자가 내적 경성으로 이르게 된 무정념의 경지 자체가 기도자에게 우주만물과 창조주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얻게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무정념의 상태는 최소한 피조물과 인생과 창조주에 대한 궁극적 진리들을 최상의 정신적 상태에서 관상할 수 있게 해준다. 에바그리우스는 이 깊은 사색의 세계를 보석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일체의 불순물이 없이 맑은 보석처럼 인간의 마음속에 광활하게 펼쳐지는 사색의 우주, 그것이 바로 에바그리우스가 강조하는 기도의 세계다. 그 기도의 세계에서 피조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 궁극적 진리의 심연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신학도 인문학 탐구의 경향을 따라 갈수록 새로운 연구 방법론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다양한 연구방법론은 성경이나 성삼위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삼위의 신비를 해석하는 해석자가 고도의 정신 상태에서 그 신비를 묵상할 때 비로소 궁극적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는 에바그리우스의 고전적 방법론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든 시대가 그러했듯 우리 시대의 대중들도 삶에 대한 참 지혜를 갈망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참 지혜를 제공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좀 더 깊은 경지의 기도를 갈망하고 그 가운데 깨달아지는 지혜를 세상에 나누어 주기를 갈망해 보는 사순절이 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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