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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100주년에 바라 본 3·1정신! ( II )
대한제국에서 싹이 튼 3·1정신

기사승인 2019.01.30  0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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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은식 목사(미추홀작은도서관 관장, 예음교회)

                    목 차
I. 1919년 3월 1일에서 본 3·1운동의 메시지
II. 대한제국에서 일제 강점이 시작된
1910년 이전에 일어난 일들
   1. 정치적 상황
   2. 젊은 지식인들의 자강운동
   3. 민족대부흥운동

III. 자강운동에 앞장 선 인재들은 누구인가?
IV. 100년 전의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창작뮤지컬 ‘영웅’중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 ‘영웅’은 3·1절 100주년을 기념해 내달 9일부터 4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주)에이콤 제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나 고종의 죽음, 혹은 2·8독립선언만으로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엄청난 사건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고 말하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다. 특히 3·1만세운동은 이후 조선의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이어지는 항일 독립운동의 뿌리가 됐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3·1만세운동을 제대로 분석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1919년 3월 1일 정오 이전의 일들을 살펴볼 이유가 있다.

1. 대한제국의 정치적 상황(1900-1910)

청나라(중국) 그리고 미국이 주시하는 가운데 1904년 러시아와 일본(러일)의 전쟁이 조선 반도에서 일어났다. 결국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1905년 9월 5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미국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간에 강화조약이 수립된다.

그런데 미국은 이 강화조약이 수립되기 전 이미 ‘대한제국은 자치능력이 없어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갖는다. 1905년 7월 27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특사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서 회동을 갖고 29일에 밀약에 서명했다. 이것이 유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밀약의 내용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배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배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7일 강제적인 한일협상조약(고종실록 표기, 을사보호조약 혹은 늑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조약에 대한 어전회의가 길어지자 밖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궐내로 들어왔다. 이들은 대신들이 6:2로 반대한 것을 6:2 찬성으로 선언하고 외부대신(박제순)의 관인을 외부관저에서 가져와 찍게 했다. 치욕적인 을사늑약(乙巳勒約)의 체결 순간이다. 이렇게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지배하는 배경에는 직·간접적으로 주변국의 협력이 있었다.

1) 일본의 대한제국 지배의 국제조약
가쓰라 태프트밀약(미국은 일본에 대한제국 지배권 인정 1905.7), 제2차 영일동맹(영국의 일본지배 인정-1905.8), 포츠머스 강화조약(러시아의 일본지배인정 1905.9.5)
2) 국권피탈과정
한일의정서(1904.2), 제1차 한일협약(1904.7),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외교권 피탈과 통감부 설치 1905.11), 일제 통감부 서울에 설치(1906.2.1), 고종 강제퇴위(유생, 학생 등 수 천 명 양위에 항의-1907.7.20),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차관정치 실시 1907.7.24), 통감부, 한국군대 강제해산(1907.7.31), 재한 일본경찰 조선경찰로 임명(1907.10.29), 황태자 이은(영친왕) 유학이란 명분하에 도일-1907.12.5), 한일합방 조일병탄(조선 국권강탈, 총독부설치, 헌병 경찰제 실시-1910.8)

2. 젊은 지식인들의 자강운동

대한제국이 망해가던 때에 젊은 지식인들은 자강운동을 펼쳤다. 1900년부터 1910년까지 있었던 인재들의 활동을 보면 가히 놀랄만하다.

1) 1900년경부터 설립된 학교들(문맹 퇴치운동의 일환)
1900년/ 명신학교, 1903년/ 평양신학교, 숭의여학교, 원산여학교, 1904년/ 정명여학교, 진성여학교, 이용익과 보성전문학교, 이준의 국민교육회, 1905년/ 의창학교, 이용휘의 보성학교(고려대), 양정의숙, 박은식 등 서우사범학교, 1906년/ 영명학교, 계성학교, 보성여학교, 의명학교, 윤치호 한영서원, 민영휘의 휘문의숙, 숙명여학교 1907년/ 신명여학교, 기전여학교, 이동휘의 보창학교, 협성신학교, 안창호의 대성학교, 이승훈의 오산학교 이종호 등 한북의숙 1908년/ 창신학교, 1909년/ 의정학교 등

2)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활동의 학회발족
평북 황해지방의 서우학회(박은식, -1906.10.), 함경지방 함북흥학회(이동휘, 이준-1907), 서북학회(서우와 함북흥의 통합-1908), 영남지방의 교남학회(박정동-1908), 호남지방의 호남학회(강엽, 고정주-1907), 강원지방의 관동학회(남궁억-1908), 충청지방의 기호흥학회(정영택-1908), 청년학우회(최남선, 안창호-1910) 등

3) 국어연구
주시경(훈민정음에서 한글, 가로쓰기, 통일된 표기법)

4) 애국계몽운동
보안회 1904.4, 헌정연구회 1905.5, 대한자강회 1906.4, 대한협회 1907.11

5) 신민회비밀정치결사대
1907.4.-1911.9. 안창호, 노백린, 이승훈,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

6) 잡지, 문학 활동
 소설: 이인직의 혈의 누 1906, 장지연의 애국 부인전 1907, 이해조의 구마검 1908 등
 시: 최남선의 해에서 소년에게 1908. 이광수의 우리영웅 1910, 이광수의 옥중호걸 1910 등
 잡지: 심의성의 조양보 1906, 최남선의 소년 1908, 이해조의 자유종 1910 등

7) 무관학교설립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 동림무관학교, 밀산무관학교 등

8) 경제적 구국운동
황무지 개간권 요구 철회운동 1904, 국채보상운동 1907 대구 등

9) 신문창간
대한매일신보 1904, 만세보 1906, 대한민보 1909, 경남일보 1909, 황성신문 1910 등

10) 을사늑약으로 인해
항일의병운동: 을사의병 1905, 병오의병 1906, 정미의병 1907, 호남항일의병투쟁 1908 등
자결 순국: 이한응, 민영환 1905.11.30, 이준 열사의 분사 1907.7, 홍범식 1910 등
을사보호조약반대: 한규설 1905.11.17
을사조약 반대투쟁: 항일언론활동/ 장지연(황성신문) 시일야방성대곡 등
상소운동: 조병세, 이상설 등

11) 의병운동
13도 창의대 (대장; 이인영, 군사장; 허위)/ 원주(원용팔), 홍주(민종식), 태인(최익현)등

12) 국권회복외교
헐버트 미국에 친서전달,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파견(1907.4.20)

13) 의열 투쟁
5적 암살단, 스티븐슨 저격(장인환 1908), 이토 히로부미 살해(안중근 1909)

주변 강대국들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옥죄어 올 때 이런 활동으로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려 한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있었고 이들이 바로 3·1정신의 시작이었다.
그러면 이들은 어디에서 이런 영향을 받았을까? 울분이나 지식만 가지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3. 민족대부흥운동

젊은 지식인들의 애국자주자강운동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그것은 1903-1910년에 일어난 민족대부흥운동이라고 본다. 1903년 하디의 고백과 원산대부흥운동, 1907년 길선주 고백과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 스톡스, 리드, 겜블의 성령운동과 100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파 통합운동(1905.6)과 교회연합 및 사회연합운동이 번져 나갔다.

1) 교회연합운동
장감 재한복음주의 선교통합공의회 1905, 미 남북감리회의 협성신학교(1905) 미 남북·캐나다·호주 장로회의 독노회조직 1907, 장감 선교회의 교회잡지, 찬송가 통합발행 등

2) 사회연합운동
서우학회(1906)와 함북흥학회(1907) 통합으로 서북학회(1908)운영
서우학회의 서우사범학교와 함북흥학회의 한북의숙이 통합하여 서북 협성학교설립, 지금의 광신(光新)정보산업고등학교다. 농촌계몽운동, 3·1운동, 애국운동, 독립운동 등이 이어진다.

당시의 부흥회는 단순한 교회집회가 아니라 민족정신을 일깨웠던 일이 된다. 민족대부흥운동에 참여한 길선주와 1907년에 개종한 신석구 그리고 신선구의 친구였던 정춘수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동참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민족대부흥운동은 3·1운동의 기본 바탕이 됐으며, 나라가 망해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젊은 지식인들에게 애국 애족 운동에 나서도록 독려하는 계기가 된다. 또 이후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숱한 민족지도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렇게 참여한 젊은이들은 어디서 배출되었을까? 다음에 그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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