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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인공지능과의 공존이 가능한가?

기사승인 2018.11.29  13: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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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민(감리교신학대학교)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 박일준 지음/동연

1. Are We Ready for the Future?
인류는 3차례 산업 혁명을 겪었다. 매번의 산업혁명이 가져온 사회적 결과는 문자 그대로 혁명적이었다. 산업혁명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의 주거지역, 직업, 생활 방식 등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의식주에 큰 변화를 만들었다. 농업사회에서 기계화된 시대가 열리며 많은 이들이 도시로 이주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산업혁명의 큰 피해자라고 울부짖는 반면, 어떤 이들은 이런 사회적 변화의 거센 물결 위에 타고 올라 큰 수혜자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다가오는, 아니 어쩌면 이미 도래한 4번째 산업혁명을 맞이한다. 누군가는 미래의 다가올 변화를 거부하며 새로운 사회에 유익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물론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에 부정적인 부분도 많고 은폐 되어진 사실 또한 많다. 그러나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과 같이, 우리는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고 사회 속에서 공존하며 서로에게 유익이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의 저자 박일준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앞으로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먼 시대의 도래로 인한 시대 변화를 어떻게 성찰할지에 대해서 깊이 있는 학문적 연구와 함께 다양한 타당성 높은 논리와 학술적 자료들을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변화에 대한 올바른 대비책을 마련하게 제시한다. 저자는 과학적인 근거를 넘어 자신의 전공 분야인 종교철학적 관점으로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시대에 인간의 가치와 위치, 종교적 문제점 등을 적절하게 다루어 정리했다. 미래는 준비된 자에게 주어진다는 유명한 말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자는 급변하며 다가오는 미래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려오는 태풍과 같은 환경 속에서 소용돌이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은 앞으로 변화될 사회 속에서 사회 구성원을 이룰 사람들이 꼭 읽고 함께 미래를 준비해서 4차 산업혁명 이 막연히 주는 공포심 또 그 이면에 은폐되어진 점들을 발견하고 함께 공생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포스트휴먼 시대에는 세계를 경쟁의 장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성향이 미래를 위한 비전을 보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것은 인간 사이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 대 기계라는 프레임의 덫에서 우리는 빠져나와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경쟁을 떠나 협동과 공생의 정신과 삶을 통해 올바른 사회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기계와 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을 받아들여야한다.

근대에는 전문적인 지식인들의 역할이 각 분야의 발전을 이끌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기 이후 포스트모던 즉 탈근대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전문가 교육은 무능해지기 시작했다. 전문가가 대접받는 근대 산업혁명 이후, 대학은 전문가들을 양산하는 전문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이에 따른 문제로 자신의 전공 이외의 다른 분야의 연구결과들을 잘 알지 못하게 되었다. 전문교육이 너무 제한된 분야를 심화해서 전체 환경을 굽어볼 수 있는 '직관'을 강조하는 교육이 없으며, 이는 더 나아가 전체 사회를 조망하고 이끌어갈 비전이 상실되게 한다. 결국 이런 교육 시스템이 무한 경쟁사회를 조성하고 격려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의 사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위대한 사회는 다양한 존재들이 공존하는 사회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사실 20세기 초엽부터 등장한다. 많은 영화,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서 나타나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공통점은 ‘지금과는 다른 타입의 지적 생명체들이 소위 인간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경계를 넘어 등장한다는 것이고, 많은 경우 지금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가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존재의 형상들을 획득한다’는 내용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현실화되는 시대를 의미한다.

2. 이미 다가온 미래, 그러나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의 약육강식을 반복하고 있을 뿐.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 혹은 트랜스휴먼 시대에 진입했다. 많은 부분에서 사람들이 기계와 연결된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를 엔디 클라크는 ‘연장된 정신’이라고 표현한다. 정신이 신체와 연결된 장치들을 매개로 외부로 연장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통적으로 생각해오던 인간 정의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네트워크와 인터넷으로 연결된 가상 세계를 살아가는 현 시대 인류는 어느 특정한 시공간에 존재하기보다 여러 연결된 시공간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은 다중적으로 연장되어 존재한다. 미디어의 변화는 곧 수용주체가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를 동반하며, 단지 인신의 변화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이 미디어를 통해서 연장되는 것을 함의한다. 미디어의 변화가 인식주체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은, 매체를 사용하는 인간 매체와 인간이 육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인간-기술’의 형태로 확장되는 의미 이외에 매체의 기술적 특성과 물리적 특성의 범위와 한계가 인간이 사고하고 지각하는 범위를 제약하게 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미디어를 통해 확장되는 인간 몸, 그 주체가 인식하는 세상은 체화된 세상 혹은 신체에 들어와 있는 세상이다.

제2의 기계시대는 ‘인간과 기계의 공생’ 시대로 일컬어진다. 사실 최초로 작동하는 기계는 인력으로 작동하는 기계 즉 인간이었다. 제1 기계시대는 우리에게 이미 인간 대 기계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구조가 들어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제2 기계시대의 공생은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와 연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기계들을 공생의 행위주체들로서 포함한다. 제2 기계시대에는 쓸모 있는 인공지능을 출현시키고 공통의 디지털망을 통해 세계 대부분의 사람을 연결시킨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는 많은 미디어를 통해서 ‘인간 대 기계’의 대결 구조의 이분법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공생 시대에 우리가 직면한 핵심문제는 우리가 공생이라는 삶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면서 우리가 만든 기계에 생명의 힘을 불어 넣게 된다는 것이다. 일단 생명력을 갖게 된 존재는 더 이상 통제되지 않는다. 즉 기계들은 야생성을 획득하고, 또한 야생에 수반되는 의성을 띄며 이런 세상에서는 더 이상 만들어진 것과 태어난 것의 구별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인공지능들은 상상 불가능한 정도의 방대한 자료들을 습득하고, 그 속에서 일정한 패턴들을 파악하고 분석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다.

제2 기계시대에는 인공지능의 발달과 함께 많은 직업군이 사라지며 부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상위 소수가 소유하는 부의 크기가 점점 더 늘어나는 시대가 된다. 인공지능의 인조노동자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치하게 된다. 이미 주식시장에는 초단타매매를 담당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10분의 1초에 약 10만번의 거래를 완료한다. 인간에게 이러한 능력을 불가능하다. 기술발전의 가속도는 인간 노동자에게 적응시간을 허용치 않고 있다. 인공지능의 기술력을 통해 만들어진 빅 데이터는 사용자에게 맞춤 광고를 가능하게 하고 이런 맞춤 광고를 통해서 사람들은 보다 더 해당 제품에 흥미를 갖게 된다. 이는 곧 인조지능이 인간의 고유한 대화기술인 “설득”에 사실은 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은 공정성이란 개념을 모른다. 결국 공정성이란 개념을 수행할 수 있는 주체는 인간일 것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카플란은 인간과 기계의 공생 시대에 도래할 높은 실업률과 경제적 평등에 대한 해법으로 부의 재분배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면서, 자유 시장에 적합한 체계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획일적으로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거두어, 하위 계층에 재분배하겠다는 방식은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소득 불균형을 다스리기 위해 기업소유구조 평가에 '공익 지수'(PBI: Public Benefit Index)를 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대안들이 낡은 시대 혹은 근대 시대의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장의 대책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근대적 지식과 구별과 가치에 근거하여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시대를 가리킨다. 따라서 ‘포스트-휴면’이라함은 바로 그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 토대를 두던 사유와 가치 체계로부터 이제 탈(post-)해야 하는 시대임을 의미한다. 인간중심적인 입장의 극복. 그것은 인간/자연, 자연/문화 등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벗어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이는 곧 ‘탈-인간’(post-human)적인 사유의 방식을 도모하는 일이 될 것이다. 탈-인간주의 기획은 결국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 존재론적 범주들 즉 소수자와 연대하기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 ‘소수자되기’를 도모하려는 기획으로서, 이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했던 자연과 인공도 포함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우리는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답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이란 인간과 다른 존재로 취급되었던 다른 생명체들과 또한 도구적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 존재들과 더불어 규정될 것이며 그들과 연결되고 연동된 존재로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각각의 인간 존재는 각각의 삶의 상황에서 다른 존재들과 연결됨, 바로 그 자체와 더불어 존재하고 정의될 것이다.

세속주의는 사실상 여성들의 억압을 재강화 했으며, 여성들을 합리적 시민권과 정치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시켰다. 세속주의는 이제 탈세속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포스트휴먼의 기획이 휴머니즘의 인간 개념을 넘어 소수자와 연대하기 혹은 보다 동물-되기, 지구-되기, 기계-되기와 같은 기획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곧 성/속 혹은 성/세속을 나누던 이분법의 세계관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시대에 주어진다는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곧 우리 삶에 성스러움의 차원을 회복하는 일이다. 따라서 포스트휴먼 시대는 종교가 극복되거나 사라지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세속화를 극복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와 다른 종교의 역할을 요구한다. 세속화란 성스러움의 영역이 해체되는 것을 가리킨다면, 탈-세속화란 바로 성스러움이 해체되지 않고 우리의 세속적인 이해와 인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남아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인류는 기근과 질병과 전쟁을 극복하는 문제를 넘어서 행복과 불멸과 신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영원한 행복과 불멸을 추구하면서 인간들은 실상 자기들을 신으로 향상시키고자 한다. 이를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호모 데우스, 즉 신과 같은 존재로 업그레이드 되는 일로 표현한다. 인간을 신들로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혹은 분야에서 진척될 것이다. 생물학적 엔지니어링, 사이보그 엔지니어링 그리고 비유기적 존재들의 엔지니어링. 유전공학과 뇌 과학 그리고 인지과학 등의 인접분야들의 발전으로 이제 생물학적 진화를 인간 주체의 의도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유기적 몸과 두뇌를 비유기적 기계장치들과 연결하여 인간을 향상시키려는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다. 이 변화는 인류 역사상 처음이며 이제까지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이다. 인간 자체를 변환시키는 기술은 없었다. 기술공학이 인간의 마음을 ‘재-설계’하게 되는 때, 지금까지 인간을 규정해 왔던 호모 사피엔스는 사라질 것이고, 인간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의 인류 기획은 신성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하라리는 주장한다. 여기서 신성 혹은 신을 규정하는 방식은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 호모 데우스 시대의 신은 이와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진다.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아닌 특정한 초능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 갗이 인간적이고 부족하고 결함이 많은 존재였지만, 인간을 뛰어 넘는 초능력을 가지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모든 존재가 더불어 평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시대를 꿈꾸는 시대를 가리키는 의미로서 탈세속화를 해야 한다.

3. 호모 데우스 시대에 신학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기독교 신학 관점으로 바라보는 포스트휴먼 시대는 어떠한가? 기독교 신학의 핵심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에 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신은 죽었지만 역설적으로 신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영이 되었고 그것이 성령이다. 인간이 되어 죽은 신은 이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육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가 되어 그를 믿는 공동체 안에서 가상적 실체로 즉 믿는 주체들이 그것이 마치 살아 존재하는 듯이 행동 하도록 만드는 힘으로 존재한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믿음을 필요로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것은 어쩌면 그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믿은 믿는 자들의 공동체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주인과 노예가, 어른과 아이가, 피부색과 인종을 넘어서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한 자매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2천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직업과 계급에 상관없이 평등하다는 것을 원칙적으로 당연하게 믿는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이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동등성 즉 존재론적 동등성을 믿고 행동하는 시대이다. 철학자 코링턴은 이를 영적 훈련 같은 것이며 계속적이고 그리고 중단 없이 새롭게 갱신되어야 하는 개념의 훈련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지, 어떤 꿈을 통해 실현해 나갈 것인지를 정신적으로 훈련하는 시대가 바로 포스트휴먼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알고리즘을 통한 연산이라는 현대 과학의 통찰은 자유주의적 인간주의의 토대가 되는 하나의 단일한 진정한 자아를 가지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의지하고 행위 하는 주체를 해체하며, 더 나아가 그렇게 확고한 의지를 지닌 의식 주체라는 생각이나 개념을 최근의 진화생물학, 인지과학, 유전학 등의 발달로 순수한 신화론으로 해체해 주고 있다. 자아란 결국 하나의 상상적 이야기이다. 민족, 신, 국가, 정의, 평화, 사랑 등과 같이 가상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거대한 경험들의 대부분을 내 버리고, 단지 몇 가지 선택적인 표본들만을 가지고, 우리가 보거나 읽거나 들었던 영화와 소설과 연설들과 버무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견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엮어낼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종교적 믿음은 망상이라고 했다. 환상은 A라는 대상을 B라는 대상으로 착각한 것이지만, 망상은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도킨스의 이러한 구별은 뇌의 이야기적 특성을 고려한다면, 크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 글을 쓰는 본인도 4차 산업혁명을 떠올릴 때 ‘인간 대 기계’의 프레임을 벗어난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록 인공지능 A.I.의 발달과 과학, 의학의 무궁무진한 발전이 인간을 풍요롭게 해주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의 일자리를 뺏어가고 인간으로 하여금 무기력한 상태에 빠뜨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얼마 전 별세한 스티븐 호킹 박사가 말했듯이 초인류의 등장으로 인해 초인류가 아닌 대상들은 궁핍하여 지고 지배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이 기대보다 더 컸다. 그러나 저자인 박일준이 책속에 쓴 문구와 같이 ‘포스트휴먼 시대는 외계로부터 받은 영향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발전시킨 사회의 도래임으로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함께 공존하라’는 말은 미래에 대한 많은 불안감을 떨쳐주었다. 또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드는 일은 미래에도 기계보다 인간의 능력이 뛰어날 것이기에 결코 인간은 위축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실제로 많은 분야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점으로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시뮬레이션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처럼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 좋은 대비책이 될 수 있을 확률이 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미래에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자신의 존재적 이유과 가치에 회의감을 느끼고 공허함에 빠질 위험이 큼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책에서도 이 부분을 명확히 다루고 있다. 종교적으로도 이런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그러나 조금 더 많은 전문가들이 다루지 않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가고 싶다. ‘인간-기계’의 관계를 준비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인간-인간’의 관계에 더욱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일자리로 인한 공허함 이외에 트렌스휴먼 시대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느끼는 공허함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질문을 남긴다. 성육신적 공동체는 일반적 사회를 다룬다면, 본인이 궁금한 부분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대한 부분이다. 실제로 영국에서 4차 산업혁명을 다룬 드라마를 제작했다. 그 드라마의 한 편에서 인공지능 로봇, 인조 노동자들이 우리 삶에서 일을 하는 내용을 다뤘다.

어느 맞벌이 가정에서 가정 도우미 로봇을 고용했다. 직장에서 퇴근해서 집에 오면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어 어린 딸과 잘 못 놀아주고 가족들 음식을 못 챙겨주는 여성과는 달리 로봇은 지치지 않는 체력과 기계적인 레시피를 통해서 맛있는 음식을 가족들에게 제공하고 어린 딸아이와도 잘 놀아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엄마가 일찍 퇴근을 하고 저녁을 만들어 주는데 가족들은 로봇이 만든 음식보다 맛이 없다고 타박을 했다. 밤이 되어서 딸이 잠들기 전에 동화책을 읽어 주려는데 딸이 엄마에게 말하기를 “로봇이 읽어주는 책이 훨씬 재밌어. 엄마는 원래 나랑 잘 안 놀아주고 동화책도 피곤하다면서 대충 읽어주잖아. 나는 로봇이 읽어주는 책 들을 거야”라고 엄마를 로봇보다 못하게 밀쳐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공허함은 우리가 어떻게 채워야 할 것인지 생각이 든다. 일반적인 타인과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 성육신적 정신의 공동체의 모습으로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간 사이의 사랑의 문제에 대한 방안을 세우고 반응하지 못하면 이건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것은 순환적 실업과 구조적 실업을 넘어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지 않고 로봇을 사랑할 때 소외되는 인간의 실망감에 대한 사랑의 실업이다.
 
또한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2차 산업혁명 당시에도 정교화 되고 일 처리 속도가 빠른 다양한 기계들의 출현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은 기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삶의 회의를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기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패배감에 휩싸인 사람들은 공허함에 빠져서 무료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이 당시 교회가 사회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이유를 잃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믿고 삶의 목적과 이유가 돈을 버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내게 주어진 삶의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자는 깨달음이 패배주의를 이겨내도록 했다. 책에서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칼 마르크스의 주장에 아편은 진통제이지 치료제가 아니라고 했다. 사실 아편이 감당하는 진통제로서의 역할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 즉 치료제의 역할이 4차 산업혁명에서 어떠할지 기대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책에서는 ‘시대로부터 비롯되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로 나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가 아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이유이다’라는 말로 끝났다. 교회가 결코 단순 진통제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문제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치료해 주는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다뤘으면 좋겠다. 

이 책은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 포스트휴면 시대, 트랜스휴먼 시대를 현실적으로 자세히 다룬다. 실제로 현재까지 발전한 과학 기술의 실제를 아주 잘 이해하고 책의 내용에 녹여 들게 하였다. 그리고 책이 말하는 트랜스휴먼 시대가 아주 가까이 왔음을 생각할 때 너무나도 훌륭하게 다양한 주장들을 접하고 대비하게 해줌을 느꼈다. 나의 미국 대학 동기 친구들 중에 많은 이들이 현재 4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벌써 적용되고 있는 자율주행을 개발하는 친구, 양자컴퓨터를 연구하는 친구, 바이오공학을 통해 사람의 머리를 다신 신체에 이식하고 뇌에 있는 데이터를 컴퓨터에 다운로드 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 이들과 연락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면 가끔 섬뜩할 정도로 세상이 급변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본인이 느끼기에 다가오는 포스트휴먼 시대에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실천해야하는 부분은 ‘공존’이다. 미래의 현실을 보다 효과적으로 맞이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존을 잘 해야 한다고 책이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공존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 것이 있다. 무조건적인 수용이 공존의 방식이 아니라는 중요한 점이다. 무분별한 이해와 포용이 가져오는 관계의 형태는 어떤 한 대상에 대한 식민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분별력을 길러 공존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대로 함께 유익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저자가 책을 통해서 강조하는 주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만물을 지배하던 인간의 존재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초인류의 등장에 굴복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책이 알려주는 공생하는 법을 배워 포스트휴먼적 존재론을 토대로 살아가야 한다. 사실 초인류는 내가 될 수도 있고 내 주위의 누구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 가져오는 트랜스휴먼의 모습이 나와 당신, 우리의 미래의 모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책이 알려주는 다양한 공생하는 법을 배워서 함께 위대한 사회를 이루는 사회 구성원들이 되기를 바란다.

기독교타임즈 gaml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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