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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묵상 영성훈련과 침묵기도

기사승인 2018.11.13  17: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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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영성 산책

최근 우리 사회의 키 워드 가운데 하나가 “Well Being! Well Dying!”이 아닌가 싶다. 복된 삶과 존엄한 죽음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별히 노년 인구가 증가하며 존엄하고 복된 죽음에 대한 관심이 많아 ‘죽음 준비 지도자 강사’라는 자격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영성가들은 죽음을 친밀하게 생각해 죽음과 함께 살았다. 실제로 동방정교회의 수도실을 보면 벽에 이미 죽은 수도자들의 해골을 쌓아 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방정교회의 영성의 고전인 필로칼리아에 보면 영성가들은 죽음을 아담의 딸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왜 죽음을 아담의 딸이라고 불렀을까? 그 이유는 아담의 범죄를 통해 죽음이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서방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영성가인 성 프란시스코는 자신의 태양찬가에서 죽음을 자매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 프란시스코가 죽음을 자매라고 한 이유는 죽음은 창조주가 정한 법칙으로 우리 삶에서 무언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피조물들과 함께 창조주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기능하는 피조물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을 삶의 가장 엄숙한 스승이요 사랑스러운 동반자로 여겼다. 특별히 동방정교회의 영성가들은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묵상함을 통해 마음의 청결을 경험하곤 했다. 그들은 자신의 장례식을 상상하곤 했는데 그것은 현실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는 모든 것들을 홀연히 초월하게 했다.
우리의 현실과 죽음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욕심과 근심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자는 부자이기에 근심이 떠나지 않음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에서 잘 알 수 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어리석음을 죽음이라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에 의해 깨우쳐 주시지 않는가? 우리가 죽음을 묵상하면 그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데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머리가 가벼워지는 것을 보니 죽을 날이 다가 온 모양이다.” 임박한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에 가득한 욕심과 근심이 사라지기에 머리가 가볍고 청결해 지는 법이리라.
그러한 이유 때문에 동방정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묵상은 무정념無情念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청결에 이르는 중요한 영성훈련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무정념이란 영어로 “dispass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직역하면 passion이 없다는 말이 된다. passion은 보통 열정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본래 격정이나 욕정 같은 부정적인 의미도 있다. 무정념의 상태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해방된 평정심의 상태를 의미한다.
죽음 묵상이 그런 역할을 하는 이유는 죽음의 두 가지 차원 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죽음의 불가피성이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창조주의 법칙이다. 또 하나는 죽음의 시간에 대한 불가지성이다. 누구도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를 알 수 없는데 그것이 피조물의 한계이다. 그래서 시 90:12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살아갈 남은 날의 수를 계산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러하기에 죽음은 삶의 가장 엄숙한 스승이 되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성가들은 죽음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의 하나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죽음을 삶의 동반자로 여길 때 우리는 “죽음 없는 죽음(The Death without a Death)”을 맞이할 것이다. 이것은 필자가 만들어 본 개념이다. 죽는데 왜 죽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이 없다는 의미는 두려움, 후회, 사별의 고통 같은 죽음(a death)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미롭게도 영성가들은 종말론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영성가들의 글을 보니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의 재림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다. 왜 그들이 종말에 관심이 없었을까? 그들에게는 언제 우주적 종말이 오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말을 맞을 준비를 하며 매일을 살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인 죽음이 올 것을 준비하며 살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죽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맞을 수 있었다.
그럼 죽음묵상 영성훈련과 침묵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필자가 운영하는 “열번의 물러남-한국교회를 살리는 10주간 기도학교”에서 실천하는 매뉴얼을 소개한다. 이것은 자신의 장례식을 묵상해 보는 것이다.

만일 내가 오늘 생을 마감한다면 내 자신의 장례식은 어떤 모습일까?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생각하며 묵상하고 기록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나의 장례식에는 가족들 외에 몇 명의 조문객이 참여하겠는가?
둘째, 나의 장례식을 인도하는 집례자는 나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해 어떤 인생을 살았다고 회고하는가?
셋째, 나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조문객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넷째, 땅 속에 묻힌 나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남길 것이 있다면 내가 베풀었던 사랑이 아닐까? 나는 얼마나 사랑을 베풀었는지 점수로 체크해 보자. (점수가 높을수록 사랑이 많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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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이 땅에서 계속 살게 하신다면 이제부터 내가 꼭 해야 할 5가지는 무엇일까?
여섯째, 아직 남아 있는 나의 삶을 위한 기도문을 써보자.

김수천 교수(협성대)

기독교타임즈 gamly@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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