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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미문에서 있었던 일

기사승인 2018.06.08  10: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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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기도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오전 9시, 오후 3시에 성전에서 기도했다(행 2:15 ; 3:1). 특히 이 기도 시간에 성전에서는 율법에 언급된 대로 타미드(Tamid) 제사가 드려졌다(출 29:39-42 ; 민 28:4-8). 성전에 오르던 베드로와 요한은 화려하기로 유명한 ‘미문’, 즉 아름다운 문 곁에서 태어날 때부터 지체가 불편하여 걷지 못하는 이를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문’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들은 이 문이 성전에서 남성들의 뜰과 여성들의 뜰을 구분하는 니카노르 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이방인의 뜰과 여인들의 뜰을 구분하는 문이라고도 한다.

하여간 그는 날마다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다 놓으면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여 삶을 연명했다. 유대율법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지체가 불편하여 다리를 절거나 걷지 못하는 이는 성전에 출입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삼하 5:8). 그래서 이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성전 문 앞까지였고,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기에 평생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날도 그는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했다.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눈여겨보며 “우리를 좀 보시오” 라고 말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주려니 기대하면서 두 사도를 쳐다보았다. ‘구걸했다’로 번역된 ‘ἠρώτα ἐλεηµοσύνην’의 시제는 미완료과거이다. 미완료과거는 과거의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시제이다. 따라서 이는 성전에 출입하는 다른 이들에게 했던 것처럼 똑같이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구걸했음을 뜻한다. 목적어인 ‘ἐλεηµοσύνη’는 동정심이나 후덕함을 뜻하는 명사다. 이를 통해 상상해 볼 수 있는 장면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불쌍하게 보여서 동정심을 유발시켜 동전 한 잎이라도 얻으려는 간절한 몸짓과 표정이다.

그에게 베드로가 말했다 : “나는 은과 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십시오”. ‘은과 금’은 많은 액수의 돈을 의미할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벧전 1:18).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베드로는 실제 가진 돈이 없었다. 첫번째 정황은 2:43-45에서 살필 수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이 중심이 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재산을 공유하며 필요한 만큼만 소유했기에 오직 선교에 여념이 없던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돈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두 번째 정황은 사도행전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눅 9:3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길을 떠나는 데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고, 속옷도 두 벌씩은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셨다. 베드로는 파송받은 제자가 지켜야 할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고 있다. 세 번째 정황은 사도행전 저자의 신학과 연관되어 있다. 저자는 사도들이 재물에 대한 탐욕을 극도로 경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20:33에서 바울은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네 번째 정황은 사도행전 8:9-24에서 볼 수 있다. 사마리아 성의 마술가 시몬은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여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그 능력을 마술로 여겨 돈으로 구매하려고 했다. 그 때 베드로는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라고 저주한다.

대신 베드로는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를 걷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입을 통하여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진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은 단지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일 뿐아니라, 그 이름을 가진 이의 존재성,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곧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평생 들어가 보지 못한 성전으로 그들과 함께 들어가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다.

베드로를 통하여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된 이의 삶은 이전과는 천양지차였다.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성전 입구에도 오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 건네는 푼돈이 없이는 연명할 수 없는 의존적인 삶에서 이제 스스로 걸으며 자신을 책임지는 자존적인 존재가 되었다. 또한 부정한 사람이기에 성전 출입도 금지되었으나 이제는 성전 제사에도 참여하고, 기도시간도 준수하며 다른 이들과도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인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늘 아쉬운 소리, 구차한 말만 하던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것은 단지 그의 신체뿐이 아니었다. 단절된 사회적 관계,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회복시킨 것이다.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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