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setNet1_2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일제강점기 이규갑 목사의 생애와 민족운동

기사승인 2018.03.08  13:54:57

공유
default_news_ad2

- 잊혀진 민족운동가, 한성임시정부의 주역 이규갑을 말하다

Ⅰ머리말

이규갑 목사는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신간회 활동에 참여한 민족운동가다.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갓난아이를 잃었고, 부인 이애라는 일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일찍 요절·순국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1962년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규갑의 ‘한성정부’ 수립 참여를 제외하면, 그의 생애와 행적은 깊이 있게 연구되지 못했다. 이는 단편적인 회고를 제외하고는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Ⅱ 3·1운동 이전 이규갑의 생애

이규갑은 1888년 11월 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아버지 이도희와 어머니 박안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과에 급제하여 규갑이 태어날 무렵 무관인 첨지였지만, 규갑이 10살 되던 1897년 무렵에는 전라남도 화순 군수를 지내고 1902년에 별세했다. 형인 이규풍(李奎豊)도 무과에 급제하여 대한제국 무관으로 봉직하다가 1907년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노령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했다. 
이규갑의 학력으로는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후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공통적으로 서술되는 사항이다.
그는 1929년 6월 조선기독교 미감리교회 연회에 참석하여 ‘집사성품’을 인정받았고, 미아리교회 본처 목사로 파송 받았으며, 이듬해 9월에는 장로목사가 되었다. 1930년대 이후 ‘기독교조선감리회 연회록’의 회원 명부에는 집사목사를 받은 해를 1922년, 장로목사가 된 해를 1930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남감리회 소속으로 목회를 한 경력을 인정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갑의 의병활동과 헌병대 입감 기록,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기록은 그 객관적인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교육활동을 했던 기록은 다음과 같은 두 기록이 남아있어 확인된다.
“충남 공주군 영명녀학교 교감 리규갑씨의 통신을 거한즉 학교 제일회 졸업식을 4월 2일에 해군(該郡) 예배당에서 거행하였는데 당일 성황은 관민간 내빈이 4백여인이오 기타 관광 제씨가 수백인이라 학생들의 청아한 창가와 내빈의 유익한 연설이며 권설을 재미있게 들을 때에 청중이 박수 갈채하고 교장이 졸업증서를 수여하니 졸업생은 진영신 김일나 박루이사 서유돌라 강면네 로마리아 등 6인이며 또한 진급생은 서순애 등 32인이니 기쁘도다. 이 여학교 졸업식은 충남에 처음 있는 일이니 충남 여자계에 빛이라 할 수 있다 하였더라”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 이규갑이 1913년 4월 2일에 거행된 그 학교 제1회 졸업식 상황을 당시 교계신문인 ‘그리스도회보’에 제보하여 5월 19일자 신문에 실린 것이다. 
이규갑은 1917년 5월부터 공주에서 여자야학교도 설립하여 아내와 함께 운영하였다. 다음은 1918년 2월 9일자 ‘매일신보’에 보도된 기사다.
“대정(大正) 6(1917)년 5월부터 교감 이규갑(李奎甲)씨의 열심으로 여자야학교를 설립한 바 교사는 元 영명학교 교사 이심숙(李心淑)과 여자고등보통학교생 중 이신애(李信愛)의 열심으로 교도하야 출석학생이 30명인데 근근자자(勤勤孜孜)하고 일장월취(日將月就)하며 전진지망(前進之望)이 파다한 고로 여자야학교 성황이 여차함은 이규갑씨의 열심소치라고 칭송이 유(有)하더라”
여기서도 이규갑이 교감을 맡고 있는 것은 교장은 선교사가 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설립자와 교사로서 자신의 아내이자 전 영명여학교 교사였던 이심숙(이애라), 이신애와 함께 여성교육에 힘썼던 것이다.

Ⅲ 민족운동 참여와 역할

1) 3·1독립운동
이규갑이 1919년 3·1독립운동에 깊이 참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성정부’ 수립과 관련된 자료를 제외하면 이에 대해서도 별다른 자료가 없다. 특히 이규갑의 경우 3월 초순부터 숨어 지내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만세시위 자체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규갑은 그 무렵 평양 남산현교회 전도사로 있었으나, 1919년 2월 평양지역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서울에 올라와 3·1독립운동 준비에 가담하였다. 이것도 그의 회고를 근거로 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이규갑 선생’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후 그는 이애라씨와 결혼하고 평양에서 계속 교육에 투신하여 구국운동을 암암리에 전개하던 중 평양에서 서울 본부로 보낼 대표로서 신홍식, 길선주, 안세항, 이규갑 등 네 명을 선출하므로 평양 대표가 되었다. 1919년 2월 신홍식, 안세항, 이규갑 등 3인만 상경하여 그 즉시 안세항씨는 일본 동경으로 떠나서 우리 교포와 유학생의 연락을 맡고, 이규갑과 신홍식씨는 진신(縉紳-한말 고관을 지낸 분들)을 교섭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도록 권유하다가 신홍식씨가 우리 국민 대표로 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된 후에는 그가 직접 진신을 교섭하여 경향에서 만세운동하는 것을 감독 지도하였다.”
이 서술은 꼭 이대로는 아니라도 상당한 진실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신홍식 목사는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공주동지방 순회목사가 되었으며, 1915년부터는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공주읍교회 담임을 거쳐 1917년 평양남산현교회를 담임하다가 3·1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러니까 이규갑은 공주에서 공주여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지냈으며, 1919년 2월 바로 그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함께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신홍식이 이규갑을 평양으로 불러 전도사를 맡겼을 가능성도 크다.
이규갑이 3월 초순부터 세브란스병원에 들락거리며, 부상자를 위로하고, 4월 초 이일선(李日善)에게 ‘국민신보’ 발행 자금을 제공한 자료도 남아있다. 이일선은 이규갑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등사판과 종이를 구입하여 ‘국민신보’ 제1호(4월 중순 발행)에서 제28호(8월 28일 발행)까지 매회 300여매씩 등사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종로통과 동대문 부근 민가에 배포하였다. 특히 1919년 4월 25일 종로통에서 일경이 수습한 ‘국민신보’ 제11호는 ‘한성정부’의 조직과 4월 23일의 ‘국민대회’를 알리는 특집호였다.  

2) 한성정부
이규갑은 홍면희(1919년 4월 홍진으로 개명)와 함께 이른바 ‘한성정부’ 수립의 주역이었다. 그리고 근래에 한성정부의 조직주체와 선포경위, 그 성격에 대한 상세한 연구들이 이루어져 그 실체와 성격이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와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를 느끼고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3월 초순경부터였다. 이규갑은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 동지들은 비밀리 연락을 취하여 우선 이 운동을 조직화할 것을 궁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 당장에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장차 독립투쟁을 위한 전열을 정비하는 구심점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제의해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후에 조선민족대동단에 참여한 유림계열의 사람들이었다. 홍면희의 교섭으로 현직 검사인 한성오의 집에서 3월 17일 전술한 유림계열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각원들을 선출하였으며, 13도 대표자 대회를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열고 이를 국민에게 공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경성 부인성서학원 교사 이동욱에게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선포문’을 집필토록 의뢰하고, 홍면희 이규갑 김규 민강 등에게는 각 지방의 대표들을 권유하여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이게 하는 임무를 맡겼다. 임시정부는 “해외망명정부로서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각원들은 모두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국지사들”로 선임하였다. 각원의 명칭도 “총장”으로 하고, “정부조직을 대통령제로 하지 말고, 제국식(帝國式)의 이름”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선임된 “임시정부 각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외무부 총장 박용만
내무부 총장 이동녕
군무부 총장 노백린
재무부 총장 이시영 차장 한남수
법무부 총장 신규식
학무부 총장 김규식
교통부 총장 문창범
노동국 총판 안창호
참모부 총장 유동열 차장 이세영
이밖에 평정관(評政官) 18명, “파리강화회의에 국민대표로 출석할 위원” 7명, “13도 대표자” 25명, 6개조의 “약법(約法)”도 이 회의에서 마련된 것 같다.
이규갑은 각도 대표들에게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 모이도록 통고하는 한편, 이동욱이 작성한 ‘국민대회 취지서’ 및 국민대회 ‘선포문’을 서소문동에 있던 그의 집안사람인 이민홍(李敏洪)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조각공 두 사람을 고용하여 목판(木版)에 새겨 6천매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당시 재정을 맡았던 민강과 함께 그 목판을 그 집 뜰에 묻어버렸다.
4월 2일이 되어 이규갑은 홍면희 등과 함께 인천 만국공원에 갔으나, 지방 대표들은 수원 강화 인천 등 인근 지역의 10여명이 참석하였을 뿐 거의 나오지 않았고, 서울에서 참석하기로 한 각 단체 대표들만 참석하여 20명 내외밖에 모이지 않았다.
그날 모임에서 이규갑과 홍면희는 그대로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세워서 운동을 하기로 하자”고 제안하였으나, 한남수가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강화회의의 상황도 모르고, 상해에는 임시정부가 되어 있다는 말이 있으니 만약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있다면 두셋의 임시정부를 세워서는 안 될 것이니 우선 강화회의의 상황과 상해에서의 임시정부가 섰는지 어떤지 부터 조사하고 나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말하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어 다시 모여 상의하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이규갑은 4월 4일 한남수를 서울로 불러 그가 직접 상해에 가서 알아보고 암호 전보를 보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제안에 따라 한남수는 이규갑이 마련해 준 여비 3백원을 받고 4월 8일 출발하여 4월 16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를 밀정으로 오해하여 상황 파악에 시일이 걸려 4월 21일 아침에야 약속된 암호 전문을 김규가 머물던 집 주인 김하원에게 보냈다. 그 전보의 내용은 이미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으므로 국내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세우는 계획을 중단하라는 의미였다.
한편, 이규갑은 학생층을 포섭하여 국민대회를 준비하며 한남수의 전보를 기다렸으나, 전보가 늦어지자 “국민대회 개최의 일과 지방조직, 그리고 운동자금념출, 옥중에 있는 민족대표자들의 옥바라지 등” 자신이 맡아 하던 일을 공주에서 3·1운동을 일으키고 그 무렵 서울로 피신해 있던 현석칠 목사에게 맡기고, 4월 중순경에 홍명희와 함께 상해로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났다.
이규갑과 홍명희는 앞서 목판으로 찍어낸 ‘국민대회 취지서’와 임시정부 내각 명단과 약법 등이 수록된 국민대회 ‘선언서’를 담배갑과 성냥갑 속에 숨기고 중국인으로 변장하여 4월 20일경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는 이미 10여일전인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이 성립되고, 다음날인 4월 11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었다.

3)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규갑과 홍면희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19년 4월 20일경이었다. 이미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임시의정원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규갑은 “우선 상해정부에 내가 이러한 일로 왔다는 전갈만 해 놓고 각원들이나 기타 중진급 지도자들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리며” 홍면희와 함께 여관에 투숙하였다. 그러나 상해 임시의정원에서는 “4월 23일 경성에서 제정한 임시정부 조직 선포문과 각원 선정에 대해” 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공교롭게도 서울에서는 ‘한성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국민대회를 열던 날, 상해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러자 이규갑은 한인청년회에 들어갔고, 5월 4일 청년회와 청년단이 대한청년단으로 합병하는 회의에서 서무부장 겸 서무부 비밀부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청년단은 임시정부의 내각을 원조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이규갑은 상해 임시정부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청년단을 통해서 임시정부 내각을 원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5월 25일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가 미주 교포들이 모아준 독립운동 자금을 가지고 상해에 부임해 옴으로써 상황이 변하였다. 이규갑은 한말 신민회 시절부터 안면이 있던 안창호에게 ‘한성정부’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지나치게 과장되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규갑은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어렵게 생각했던 두 정부의 통합문제도 도산과 내가 마주앉아 의논하게 되니 쉽사리 그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명목상 도산이 상해정부의 대표이고 내가 한성정부의 대표 자격이었지만, 우리는 十年知己의 다정한 해후의 분위기를 지켜나갔다. 나는 한성정부보다 상해정부가 단 며칠이라도 먼저 생겼으니 우리가 상해정부에 합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양보하였고, 도산은 아무리 상해정부가 활동력 있는 쟁쟁한 독립지사들이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나라를 떠난 유랑자들에 의하여 된 정부이고, 한성정부야말로 국내에서 13도 대표들이 모여 국민의 총의에 입각하여 만든 정부이니 상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고 극력 사양하였다.”
이규갑은 안창호의 권유로 1919년 7월 7일에 개회한 제5회 임시의정원부터 충청도 의원(보결 선임)으로 참여하였다. 홍진(홍명희)은 이미 4월 30일에 개회한 제4회 임시의정원부터 충청도 의원과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제5회에서는 법제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특히 임시의정원 제6회(1919. 8. 18~9. 17) 중에는 ‘한성정부’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조안이 제안되어 통과됨으로써, 국무총리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임시헌법도 개정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고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한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성정부’의 주역이었던 이규갑과 홍진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규갑은 1924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그곳에서 남감리회 소속 목회자로서 기독교 선교와 교육사업에 종사하던 중 1925년 그곳에 교사로 부임해 온 이화여전 출신의 김애라(金愛羅)와 재혼했다.  
이규갑이 1920년대 중반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에서 남감리회 소속으로 목회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에도 가담하고 있었음은 다음과 같은 일제 영사관의 기밀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3월 1일은 소위 삼일운동 제8주(년) 기념일로서 浦潮 신한촌에서는 그곳 남감리교회당 樓上에 다음과 같은 주최자가 집합하여 과격한 강연을 하고 회중은 약 1500명에 이르렀으며, 만세 소리 속에 해산하였다고 한다.

주최자 남감리교 목사  金永學
동(同)              柳燦熙
동(同)              李奎甲
고려공산당원          李濟
동(同)              李永善
先鋒社 主幹           吳成默”
여기서 이규갑이 목사라는 것은 잘못된 정보이지만, 남감리회 소속 교역자로서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교회당에 모여 3·1절 기념행사를 주최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4) 신간회
이규갑이 해외 망명생활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귀국한 것은 1927년 무렵이었다. 그 무렵 국내에서는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협동전선의 최고기관인 신간회가 조직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신간회는 홍명희·안재홍·신석우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종교계 지도자들과 일제의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타락하지 않은 민족주의 세력과 동맹을 모색하던 조선공산당계 인사들을 망라하여 1927년 1월 19일 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2월 15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출범하였다. 처음부터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 합법적인 단체로 출범하려 하였기 때문에 발기인 대회에서 채택한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이라는 간결하고 온건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포된 의미는 본부와 각 지회들의 현실적 정책 제안에서 드러나듯이 우리 민족의 정치적 완전 독립과 경제적 해방, 자치운동의 부인, 타협적 개량주의 운동의 배격, 민족의 총단결, 민족적 권익의 실현을 지향한 것이었다. 실제로 신간회에서 입안하고 추구했던 정책들은 타협주의 정치운동 배격과 민족운동 지원, 한국인의 빼앗긴 기본권 회복, 한국인에 대한 탄압법령의 철폐, 일본인 이민과 착취기관 철폐, 일제의 경제수탈 철폐, 조선인본위 교육과 조선어 사용 교육 실시, 여성에 대한 차별·억압제도 폐지, 형평사원 등에 대한 차별 반대, 농민 소작인의 권익 옹호, 노동자의 권익 옹호 등이었다.
이규갑이 신간회 경동지회(京東支會) 설립에 참여한 것은 1929년 4월부터였다. 1929년 6월 16일 경동지회 설립대회에서 이원호(李垣浩)가 한 경과보고는 다음과 같다.
“본회는 지난 4월 27일 권유복 이규갑 서광훈 심의성 정관진 등 유지의 주창으로 발기하여 5월 7일 오후 3시 전기 유지는 숭인동 156 이규갑 집에서 발기회를 개최하고 본부의 찬동을 얻기로 하는 한편 회원 모집에 노력하여 신입회원 31명의 원서를 첨부하여 본부에 신청하여 설치 승인을 얻고 다음으로 5월 30일 준비위원회를 신설리 신설학원에서 개최하고 대회에 요하는 경비는 준비위원회에서 부담하기로 결의하고 오늘 이에 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경동지회는 당시 서울 근교인 고양군 “숭인면(崇仁面) 한지면(漢芝面) 둑도면(纛島面) 일대를 구역”으로 한 지회였다.

5) 1930년대 이후 목회 활동
이규갑은 신간회가 해소된 후에도 해오던 목회활동을 계속했다. 1931년 6월 개성 북부교회에서 개최된 기독교조선감리회 제1회 연합연회에서는 협동회원으로서 경성지방 돈암리구역 2년차 본처목사로 계속 파송을 받았고, 1932년 3월 경성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제2회 연합연회에서는 같은 지방 도화동구역에 파송받았다. 1934년 3월 제4회 중부연회에서는 경성지방 광희문구역 협동목사로 파송받았다. 1935년 4월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5회 연합연회에서 정회원에 허입됨과 동시에 경동지방 양주구역에 파송되어 의정부교회를 담임하였다. 이때부터 계속 의정부교회를 담임하여 1939년 제7회 연합연회에서도 5년차 그 교회 담임으로 파송받고 있다. 이 무렵 이규갑 목사는 그 지역 교육 사업과 구제 사업에도 힘썼던 것 같다. 의정부역 앞에서 살던 어떤 부인이 먹지도 못하고 냉방에서 아이를 낳다가 기진한 것을 알고 돈을 주어 쌀과 나무를 사게 하고, 이웃 병원 의사를 청하여 돌보게 하였다는 미담 기사가 중앙 신문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또한 1939년 9월경 양주중학교 설립 기성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일제의 정책에 따라 화곡춘수(禾谷春洙)로 개명한 정춘수 감독은 1941년 3월 6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제8회 동부 중부 서부 연회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 연회는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해산하고, 일본 메소디스트 교단 규칙을 모방한 이른바 “신교단규칙”에 의해 “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설립하기 위한 회의였다. 종전의 3부 연회를 해산하고, 같은 장소에서 3월 10일에 개최된 “기독교조선감리교단 제1회 총회”는 통리자로 정춘수 감독이 선임하고, 이 신교단규칙에 따라 만주교구를 포함한 10개 교구제를 실시하며 각 교구장을 임명하였다. 이 총회에서 이규갑 목사는 박연서 목사가 교구장을 맡은 경성교구 왕십리교회에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 이 무렵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전시체제하 감리교단의 부일협력에는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3년 8월경 전진규(全珍珪) 통리 하에서 그가 경기교구장을 맡은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이는 정춘수(鄭春洙)와 변홍규(邊鴻圭)의 혁신교단 참여로 감리교회가 진통을 겪고 있을 때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감리교단 특별총회에서 선임된 것이었다. 그러나 총독부 경무국에서 이 선거가 부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트집을 잡아 무효화시키고,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경기교구장으로서 실제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1945년 해방 이전까지의 이규갑의 생애와 민족운동을 정리해 보았다. 이제 이상에서 밝혀진 몇 가지 사실을 요약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로 이규갑은 선교사의 중매로 1912년에 이애라와 결혼하고 1918년 초까지 공주에서 함께 교육활동을 하였다.
둘째로 이규갑이 1911년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은 근거가 없으며, 1910년대에 신학을 공부한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졸업 여부는 알 수 없으며, 졸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1920년대 후반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1929년 6월 연회에 참석하여 ‘집사성품’을 인정받았고, 이듬해 9월 연회에서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셋째로 이애라의 갓난 아이가 일경의 폭행으로 사망한 것은 이규갑이 상해로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난 1919년 4월 중순 이전에 일어난 일이다.
넷째로 1919년 4월 하순경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규갑과 홍면희가 전한 국내 4·23 국민대회와 ‘한성정부’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다섯째, 이규갑은 안창호의 권유로 1919년 7월부터 1920년 3월 의원 자격을 상실할 때까지 충청도 의원으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여섯째, 이규갑은 1920년대 중반 블라디보스토크 지방에서 남감리회 소속으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일곱째, 이규갑은 1927년경 해외 망명생활을 끝내고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목회활동을 하면서 1929년 4월부터 신간회 경동지회를 설립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이규갑 목사는 해방 후 1945년 8월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을 맡았고, 교회 재건과정에서 일제의 강요로 통합된 교단으로부터 교파환원을 주장했으며, 12월 일본인교회인 욱정교회를 인수받아 남산교회를 설립하였고, 1946년 4월 5일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재건파) 위원장을 맡았다. 1948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남산교회를 담임하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국민당으로 충남 아산에서 출마하여 당선되고 문교사회분과위원장,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을 맡았다. 1952년 순국선열 유가족 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1959년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2년 3월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63년 민주공화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70년 3월 20일 서울 이문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장례는 3월 26일 숭의여고 교정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선영인 충남 아산에 안장되었다.
이규갑은 일제강점기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포함한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도자이다. 특히 그러던 가운데 어린 아이와 아내를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이런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1929년 이후 신간회 경동지회 설립과 1930년대 그의 목회활동도 일제의 감시라는 큰 제약이 따르긴 하였지만, 그의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꽃재교회(담임목사 김성복)가 지난달 28일,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개최한 이규갑 목사 세미나에서 발표된 원고입니다. 지난해 이필주 목사 기념비를 세운 꽃재교회는 올해 14대 담임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이규갑 목사님을 되새기고, 이웃들과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한 세미나 및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편집자주>

김승태 소장 21c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일반기사

문화

1 2 3 4
item53

교육

1 2 3 4
item54

미션

1 2 3 4
item55

오피니언

More Section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