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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취조서를 중심으로 본 감리교회와 3·1운동

기사승인 2018.03.08  13: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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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 민족대표 16명 정동제일교회에서 서명 모임

한국 감리교회는 부단히 민족구원에 앞장서서 참여하였다. 가장 대표적 사건이 바로 3·1운동이다. 이 글에서는 감리교회가 3·1독립운동의 발단과 계획, 확산에 앞장선 주역임을 밝히면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기독교인 16명의 최종 서명 장소를 33인의 법정 취조서를 중심으로 확인하려 한다. 

3·1운동 태동과 감·장 연합 추진

민족대표 33인 법정 취조서를 분석해 보면, 기독교계의 3·1독립운동 참여는 1919년 2월  10일 평북 선천에 있던 이승훈 선생에게 천도교 측에서 김도태를 보내어 만나자고 전달한 데서 태동되었다. 이승훈 선생은 2월 12일에 서울에 도착했고, 송진우 선생을 만났다. 이때 송진우 선생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 받았다.(李承薰 取調文. 李炳憲 編, 三一運動秘史, p341. 이하 비사로 표기)
이승훈 선생은 장로교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의 뜻을 전했으며 또한 평양에 가 감리교회 손정도 목사를 찾았다. 손정도 목사는 그 뜻에 찬성하고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인 신홍식 목사와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손정도 목사를 통해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전달받은 신홍식 목사는 2월 15일 평양 기흘병원(감리교회)에 입원해 있는 이승훈 선생을 만나러 간다. 문병을 가장하여 이승훈 선생을 만난 신홍식 목사는 여기서 천도교의 독립운동 거사준비를 듣고 기독교도 거사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며 신홍식 목사는 평소 생각하던 일이었던 터라 쾌히 찬성하였고 곧 서울로 찾아갔다.(비사 p531, “朝鮮 獨立思想 及 運動”, 朝鮮總督府 調査部, p44)
당시 서울에는 감리교회 미국선교100주년 행사가 있어서 많은 감리교회 목사들이 모이던 때였다. 평북 원산의 정춘수 목사도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2월 15일 남대문 밖 신행여관에 유숙하였고 여기서 박희도 전도사로부터 조선도 독립할 수 있다고 들었다.(吳華英 取調文, 비사 p531) 정춘수 목사는 2월 16일에 종교교회 오화영 목사에게 독립운동의 움직임을 전하고 박희도를 만나러 가자고 하였다.

기독교와 천도교, 학생 측 연합 성사

박희도 전도사는 당시 기독청년회(YMCA) 총무로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으며, 기독청년회원인 김원벽(金元壁)을 연락원으로 하여 보성전문학교 학생 강기덕(姜基德),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韓偉鍵), 경성전수학교 학생 이공후(李公厚), 경성전문학교 학생 주종선(朱鍾宣) 등과 1919년 1월 6일 협의하여 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 추진하고 있었다. 박희도 전도사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독교 측과 연합을 시도했다.
2월17일, 정춘수와 오화영 목사는 신행여관에서 박희도 전도사를 만났고, 이 때 인천 우각리교회(현, 내리교회)의 오기선 목사도 와 있었다.
한편 평양에서 서울로 온 신홍식 목사는 2월 18일 기독청년회(YMCA) 간사인 박희도를 찾았고 국권회복과 독립계획을 말하고, 오후7시에 박희도의 집에서 회합키로 하였다. 이때 박희도는 자택으로 정춘수, 오화영을 불러 이승훈, 신홍식, 박희도와 함께 5명이 첫 회합을 가졌다.
여기서 천도교와 공동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 단독으로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으로 천도교와 연합하는 것이 성서적으로, 신앙적으로 올바른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있었기 때문이다.(朴熙道 取調文, 비사 p432) 그 문제는 이 회의에서 결정치 못하고 장로교 측과 합석회의하기로 하고 헤어졌다.(오기선 목사는 천도교와 연합할 수 없다고 서명에 참여 않음)
2월 19일,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측 합석회의가 이갑성 선생 집에서 8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때 모인 인사는 감리교회 측의 신홍식, 오화영, 현순 목사와 박희도 전도사였고, 장로교회 측으로는 이승훈 장로, 함태영 선생, 안세환 전도사, 이갑성 선생이었다. 이 회의에서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운동 할 것을 결의하였다.(朴熙道 取調文, 비사 p432)
2월 20일, 박희도 전도사는 기독신보사의 서기로 근무하는 정동제일교회의 박동완 전도사를 찾아가 민족자결에 의하여 독립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고, 이에 박동완 전도사도 찬성하였다.(朴東完 取調文, 비사 p464) 박희도 전도사는 다음으로 종로중앙교회의 김창준 전도사를 찾아가 독립운동 계획을 말하였고, 김창준 전도사 역시 찬성했다.(朴東完 取調文, 비사 p436) 당시 종로중앙교회 담임목사는 빌링스리 선교사였고, 박희도와 김창준은 그 교회 전도사였다.
이날밤, 박희도의 집에서는 기독교 측 회합이 있었다. 이때 박희도, 신홍식, 오기선, 정춘수, 오화영, 이승훈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천도교계가 15명을 선출키로 했으니 기독교 대표도 15명 동수로 선출하자고 하였고, 다른 목사들에게도 권하여 다시 모이자고 결의하였다.(朴熙道 取調文, 비사 p435)
또 이날 모임에서 영어를 잘하는 현순 목사를 상해로 파견해 미국과 파리 강화회의 위원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하기로 하였다. 또한 일어를 잘하는 안세환 선생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일본정부에 조선독립을 청원키로 결정하였다.(朴熙道 取調文, 비사 p436)
이후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신홍식 목사와 이승훈 선생은 평안도로, 정춘수 목사는 함경도로, 오화영 목사는 개성으로 파견키로 하였다.(吳華英 取調文, 비사 p531) 이날 독자적으로 1919년 1월 6일부터 독립운동을 계획 추진해 오던 학생들과도 연합이 결정됐다.(朴熙道 取調文, 비사 p438)
2월 21일, 신홍식은 독립운동을 확산키 위해 평양으로 갔다. 22일과 23일 사이 이갑성의 집에서 기독교 측 회합이 있었다. 오후 7시에 모인 회의에는 감리교 측에서 신홍식, 오화영, 오기선, 박희도, 김세환 등이 참석했고, 장로교 측에서는 함태영, 이승훈, 안세환, 이갑성이 참석했다. 이때 이갑성을 경상도로 파견키로 하였다.(吳華英 取調文, 비사 p531)

정동제일교회에 모인 기독교대표들

2월 24일, 해주의 최성모 목사도 박희도를 찾아와 독립운동에 찬성한다 하였고, 2월 26일에는 이필주 목사에게 제의했다.(李弼柱 取調文, 비사 p126) 이필주 목사도 찬성하고 박희도를 만나러 갔으며, 이때 한강 인도교에서의 모임을 알려 주었다.
같은 날 오후 2시 한강 인도교 모임에는 이필주, 오화영, 최성모, 박희도, 함태영, 이갑성 등이 참석했고, 여기서 기독교 측 대표들이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모여 서명키로 하였다.(崔聖模 取調文, 비사 p568)
2월 27일 정오 정동제일교회 사무실인 이필주 목사 집에서 기독교 측 대표들의 서명모임이 있었다. 이때 독립선언서가 처음 선보였다. 참석한 인사는 감리교회 측의 이필주, 오화영, 최성모, 신석구, 박동완, 김창준, 박희도이며, 장로교회 측의 이승훈, 이갑성, 함태영이었다.
참석치 못한 사람 중 이승훈 선생에게 인장을 맡긴 5명도 서명시켰고, 정춘수 목사도 인장을 보내왔으므로 서명에 참여토록 했다. 단, 함태영 선생은 거사 뒷일을 맡기로 하고 서명에서 제외했다. 이렇듯 기독교 측 민족대표들은 정동제일교회 이필주 목사의 집에 모여 서명을 함께 했다.(朴熙道 取調文, 비사 p436)
기독교 민족 대표 16명은, 감리교회 9명으로 이필주, 신홍식, 최성모, 신석구, 오화영, 정춘수 목사와 김창준, 박동완, 박희도 전도사다. 장로교회는 7명으로 길선주,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목사와 이명룡, 이승훈 장로와 이갑성이었다.
2월 28일에는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 민족대표들이 최종 모임을 손병희 선생 댁에서 갖는 중에 학생과 시민들의 독립만세운동 이전에 명월관 지점인 태화관에서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이때 기독교 측 불참자는 장로교 길선주, 이명룡, 김병조, 양전백, 유여대 목사와 감리교 정춘수 목사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모인 민족대표들은 정시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때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 소리가 들리므로 이필주 목사의 제의로 민족대표도 만세를 불렀고, 곧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자리의 불참자는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목사였다.(朴熙道 取調文, 비사 p454)
 
3·1 정신의 계승, 자유와 평화, 통일의 구국 결단으로 이어져야

이상에서 기독교 측 3·1운동 추진과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첫째, 박희도 전도사의 활동이다. 당시 기독청년회 간사며 종로 중앙교회 전도사인 박희도는 천도교 측의 계획보다 빠른 1919년 1월 6일에 이미 학생대표들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희도 전도사는 이후 학생대표들과의 회합을 통해 천도교와 기독교의 거사 계획에 연합토록 하였으며, 기독교 인사들을 영입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둘째, 감리교회는 서울과 서울 이남의 중심세력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감리교회 측 민족대표 9명 중 6명이 서울에 있었다는 점이 말해준다. 서울의 정동교회(이필주), 종교교회(오화영),  수표교교회(신석구)의 목사 3명과 정동교회(박동완), 종로중앙교회(박희도, 김창준) 전도사 3명이었으며, 자연스럽게 감리교회의 3·1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서울 외 3명은 평양 남산현교회(신홍식), 해주 남본정교회(최성모), 원산 남촌동교회(정춘수) 등이다.
셋째, 기독교 측 민족대표 16명의 최종 서명장소가 정동제일교회 사무실인 이필주 목사 사택이란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3월 5일 학생 중심으로 서울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거사계획도 정동교회에서 학생대표들이 모여 계획하고 추진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동은 당시 외국공관과 선교사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일경의 눈을 피하기가 용이했던 점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현순 목사가 상해로 파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중추역할을 감당했다. 손정도 목사는 3·1운동 직전 이미 상해에 가 있었고, 현순과 만나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활동하였다. 손정도 목사는 각 도 대표로 임시정부 의정원을 조직토록 하였고, 초대 의정원 의장에 선출돼 상해임시정부의 초석을 만들었다.
3·1운동 이후에도 감리교회는 임시정부를 돕는 일과 독립군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독립군자금 모금 운동이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인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감리교회는 3·1운동 계획 초기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 감리교회로 하여금 지난 일을 회고하고 기념하며 자랑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시대적 사명을 깨달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또다시 헌신하고 행동하는 자리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 일은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 결단하는 일이며, 자유 민주주의와 평화를 굳게 지키는 구국의 다짐이며, 웨슬리의 모범을 따라 세계 구원을 향해 힘써 나아가야 하는 일이 돼야 한다.

노종해 목사 21c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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