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setNet1_2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우리 신학 한마당 - 완전

기사승인 2018.03.08  13:49:06

공유
default_news_ad2

- 박종천 목사(감신대), 이찬석 교수(협성대), 조은하 교수(목원대) 공동집필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이다. 다음의 말씀은 그분의 말씀이요 내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5:48) 그런데 누가 완전하지 말라고 하는가? 그것은 사도 바울의 교리요, 사도 야고보,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의 교리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의 교리라는 의미에서면 몰라도 결코 다른 의미로는 웨슬리의 교리가 아니다.”(웨슬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관한 평이한 해설,’ 134)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특별히 마태복음 5장은 8복에 대한 선포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어지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그 절정을, 그리고 마태복음 5장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말씀으로 끝맺는다. 웨슬리는 산상수훈에 대한 13개의 연속 설교 중에서 다섯 개의 설교를 5장 1-20절까지의 본문으로 구성하였다. 5장 21-48절은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적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8복에 대한 세 개의 설교(마5:1-12)와 율법에 대한 다섯 번째 설교(마5:17-20) 사이에 놓인 설교(마5:13-16), 즉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사회적 성격과 ‘공중적(public)’ 본성을 해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가 품으신 마음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체험을 하면 마치 우리가 변화 산상에 주와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같이 세상을 등지고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과의 신비한 합일에 몰두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8복에 포함되어 있는 우리 마음의 정감과 기질의 변화를 나타내는 온유함과 자비함 그리고 화평하게 함과 같은 성령의 열매는 결코 사막의 은둔자의 영성이라기보다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며 대화하는 가운데서만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며, 기독교를 고독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회 없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대화하는 것 없이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설교24, ‘산상수훈 설교 4,’ I.1)

그렇다면 오직 선한 사람들과만 사귀고 악한 자들을 멀리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부르신 것은 부패한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속에서만 소금의 짠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심령이 가난한 자들로, 애통하는 자들로, 온유한 자들로, 자비한 자들로, 화평케 하는 자들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로 부르신 “하나님의 섭리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가 섞여 살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이든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서 ‘소통’(communicate)하게 하기 위함”이다.(설교24, I.7)

웨슬리는 사사롭지 않고 공공적이고 보편적이며 포용적인 ‘공변된(catholic) 정신’이라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사회적 성격을 교리적 견해나 예전적 실행에서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 사이의 소통에서 찾고 있다. “비록 견해나 예배 양식의 차이는 전적인 외양적 연합을 방해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감(affection)에서 우리의 연합을 막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비록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더라도, 같이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은가? 비록 우리가 하나의 견해를 가지지 않아도, 한 마음일 수는 있지 않은가?”(설교39, ‘공변된 정신,’ I.4)

‘감리교도의 품성’(1742)이라는 글에서 웨슬리는 감리교회가 성경적 기독교로서 표방하는 ‘본질적 교리들(essential doctrines)’을 분명히 제시한다. 그것은 첫째,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둘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실행의 유일하고 충분한 표준이며; 셋째, 그리스도가 영원하고 지고하신 하나님임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을 흔들지 않는 모든 ‘견해들(opinions)’에 관하여는, ‘우리도 생각하고 (그들도) 생각하게 한다.’(We think and let think.)”(‘감리교인의 품성,’1) 

웨슬리의 ‘본질적 교리’와 ‘견해’에 대한 비판적 구별은 믿음의 ‘진리(truth)’와 ‘진리에 대한 주장(truth claim)’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본 것이다. 믿음의 실재는 믿음에 대한 관념보다 심오한 것이기에, 웨슬리는 단순하고 진실한 신자들의 교리적 견해가 부적합할 수 있다는 것과, 결함이 없는 ‘정통’ 신자들의 심령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멀리 떠나있을 수 있다고 보았다. 웨슬리의 “공변된 정신은 믿음과 사랑으로 구성되며(‘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함’: 왕하10:15상), 견해와 실행 상의 정당한 차이들에 대한 결실 있는 협상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추구했다.”(아우틀러, ‘존 웨슬리,’ 92)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세상의 빛’이요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a city set upon a hill)’와 같기에 그리스도인의 기질과 행동은 세상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사람들로부터 도피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사람들 가운데 있는 동안에 너희의 겸비함, 온유함 그리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가 완전하려고 열망하게 하는 성향들을 숨길 수 없다.”(설교24, II.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사회적일 뿐 아니라 공중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공중적 공동체는 ‘사회적, 개방적, 활동적 그리스도인들’(설교24, II.7)로 구성되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방된 관점을 가져야 하며,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비출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가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설교24, II.5)

공중적 그리스도인의 정신이 바로 공변된 정신이다. 공변된 정신의 소유자는 “종교적 원리, 즉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믿는 데 있어서 확고부동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예배 방식을 굳세게 지키며, 하나의 특정한 회중과의 가장 섬세하고 친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의 마음은 그가 아는 사람들이나 모르는 사람들 모두를 포괄하여 모든 인류를 향해 확장되어 있다.”(설교39, III.4) 모든 인류를 향해 확장된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공중적 성격이 규정된다면, 참된 성경적 완전이란 개인의 영혼의 완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공변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되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악을 멀리하고 조심하며 선한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견해와 예배와 회중에 상관없이 누구나 친구로, 주 안에 있는 형제로,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자녀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공동 참여자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동료 상속자로 사랑한다.”(설교39, III.5)

 

식별과 적용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사회적 성격과 공중적 본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역이 평화를 만드는 사역이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내면적 성결이 외부적 담화로 드러나야 한다”(설교23, ‘산상수훈 설교23,’ II.1) 뿐만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공변된 정신으로 ‘생각하고 생각하게 하라.’는 금언에 입각하여 비록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하며 자신의 마음을 확장한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에, 사랑의 표현을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나 친지나 파당, 곧 자신의 견해와 같은 사람이나 자신과 같은 고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제한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는 이러한 모든 좁은 한계를 뛰어 넘어 모든 사람에게 선한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자신의 사랑을 이웃과 이방인, 친구와 적에게 나타낼 수 있다.”(설교23, II.4)

이점에서 2016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제32회 총회에서 채택되고 세계감리교협의회에서 지지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서울신학선언: status confessionis 2016’은 의미심장하다. 다음은 서울신학선언 제5항이다.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물과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이 화해와 평화의 사역을 위해 부르신 공동체임을 고백한다.

교회는 평화를 만드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신다.(마5:9)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교회는 전쟁에 대한 평화의 대안을 찾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교회 자체가 그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교회가 참 교회가 될 때, 이 땅의 폭력과 전쟁이 종식될 것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국가를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변화시킬 사명을 가진다.(롬12:2) 참 교회는 무정부주의나 독재를 반대하며, 언제나 국가의 공정한 법질서를 지지하고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며,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의 책임 있는 의무 수행을 감시하고 비판하고 견제해야 한다.(요19:11) 참 교회는 비밀외교나 언론의 억압을 반대하며, 공적이고 정의로운 의사소통과 국제관계를 존중한다.

참 교회는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강제력을 통한 갈등 해소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가능한 한 폭력적인 수단을 삼가면서 평화적 해결을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이루신 화해와 평화를 통해 분단체제를 극복해야 한다. 분단체제와 핵 위기 하에서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평화의 메시지를 증언하고 실천하는 것임을 고백한다.”

이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평화 만들기를 위해 일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인 되기를 다짐해야 한다.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단순히 개인적인 완전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해 있는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서 온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에 동참함으로 하나님 사랑의 충만한 완전에 이를 수 있어야 한다.

감리교회의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는 목사 안수식에서 감독이 안수 받을 이와 다음과 같이 문답하는 것인데, 사실 그것은 목사 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리교도라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당신은 완전을 향해 기꺼이 나아가겠습니까?”(Are you willing to go on for perfection?)

 

기독교타임즈 21cpress@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일반기사

문화

1 2 3 4
item53

교육

1 2 3 4
item54

미션

1 2 3 4
item55

오피니언

More Section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