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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위로 일체되신 주님

기사승인 2017.09.14  17: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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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우리 신학 한마당
박종천 목사(감신대), 이찬석 교수(협성대), 조은하 교수(목원대) 공동집필

“하나님의 신성의 일체 안에 동일한 본질과 권능과 영생으로 되신 삼위가 계시니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종교의 강령 제1조 제2항).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신비 가운데 숨어 계신다. 그 신비는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시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인간의 지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므로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높이 계신 분으로 우리를 초월해 계시지만,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기뻐하셔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아버지 같으신 분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다. 그분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시다. 지상에 있는 육신의 아버지의 아버지 됨의 불완전함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교제로서 성립한다는 데 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아들이 아버지 안에’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음(요14:10)으로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별도로 존재하는 또 하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께서 증언하신 대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으로 인간이 되어 오심(빌 2:7)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난 탕자와 같은 죄인들을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교제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의 교제 가운데 참여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게 증언하신다(롬 8:16).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 아들,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곧 삼위로 일체 되신 분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일체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역에서 함께 일치되어 일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 아들의 공로를 통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주심을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게 확증하신다는 데서 삼위일체 교리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에 직결되는 복된 교리로 드러난다. 
하나님이 삼위로 일체 되심을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경륜’(經綸)을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 ‘경륜’이라는 한자어는 ‘천하를 경영하고 다스리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의 번역어이며 이는 하나님이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치 한 집안의 살림을 돌보듯이 다스리심을 뜻한다. 

에베소서 1장 9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고(엡 1: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 4:4) 제국의 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 장차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엡 1:10)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말씀과 영으로 존재하시고 일하신다. 성령은 하나님 안에서, 즉 하나님 심정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교제로부터 나오시는 분이시며, 천지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의 영’을 부어주신다(롬 8:15). 

따라서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으면 누구든지 ‘약속의 성령으로 인 치심’(엡 1:13)을 받고 성령께서 친히 우리가 누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의 보증’(엡 1:14)이 되신다. 여기서 ‘인 치심’과 ‘기업의 보증’이란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이 오늘날 ‘경제(經濟)/이코노미
(economy)’를 뜻하는바, 성령께서 미래에 우리가 영원히 누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엡 1:3)에 대한 보증서에 도장을 찍으시고 실제로 보증금으로 선불해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를 맛보아 알게 하심을 의미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9, Oil on canvas.

삼위로 일체 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우주적 드라마는 지금 여기에서 한 영혼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시작하는 우주의 새로운 창조다(롬 8:19~21, 계 21:1).

만물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회복된 하나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랑의 사명을 감당하고(엡 1:4) 하나님의 성품에 충만하게 참여하여(벧후 1:4)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위대한 구원과 일치된다. 새로운 창조는 창조의 시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끝이 아닌 끝, 곧 새로운 시작이기에, 그것은 원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승적 변형이다. 

우리는 경이로운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간에 의해 지구가 파멸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은 더 이상 근대 이전의 시대처럼 다음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사후 세계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의 삶은 눈물의 장막에 남아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한 집안에 있는 인간 공동체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온 생명을 거룩하고 복되게 회복하는 구원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았다. 구원은 하늘의 영역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과 생명에게 성경적 성결과 축복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라는 위대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예배의 삶 속에서 삼위로 일체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의 몸 된 교회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품으시는 간절한 열망을 이해하고 또한 그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전도는 교회의 선교이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이기 때문이다. 

“죄인이여 돌아오라 왜 죽으려는가?”라는 찰스 웨슬리의 찬송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열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너,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사본으로 정하신 자여! 너, 하나님이 생명 가운데 붙잡으신 자여! 너, 하나님이 스스로를 팔아 사랑하신 자여! 너, 하나님이 여전히 기다리시는 자여! 하나님은 너를 다시 창조하시려 한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값을 치르고 사신 너는 왜, 왜, 영원히 죽으려는가?”(미국연합감리교회 찬송가 346장 5절).

식별과 적용

‘삼위일체론’은 유대교와 이슬람교로부터 한 분 하나님을 부정하고 ‘삼신론’(신이 셋이라는 다신론)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했다고 화형을 당했던 세르베투스는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이 많이 살았던 스페인 출신 신학자였다. 그는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 고고한 철학적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 된다”(‘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술’ 중)고 했고, 성령은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하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자들은 삼위로 일체 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을 계몽되지 않은 신학적 비지성의 산물로 보았다. 

교회사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교부가 터틀리안이다. 그는 하나님은 자신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three persons)이 ‘하나의 실체’(one substance)로, 곧 삼위가 일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용한 위격이나 실체 또는 본질이라는 말은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빌려 온 것이다. 

위격을 가리키는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는 로마시대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배우의 가면을 뜻한다. 한 배우가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것과 같이, 구원의 위대한 드라마에서 한 분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일하시는 것을 ‘삼위일체’, 즉 세 위격이 하나의 본질을 가진 통일성 속에 있다고 본 것이다. 하나의 본질을 가진 삼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이 다르다. 동방정교회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자 하나님이 출생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숨인 성령 하나님이 출현하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서방교회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하나님이 출생하시지만,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로부터 출현하신다고 주장한다. 이 차이로 인해 동서방 교회는 분열했으나, 오늘날 ‘에큐메니칼’(교회연합) 대화를 통해 아들을 가지신 아버지로부터 성령이 출현하신다는 입장으로 양 측을 수렴하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양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문제는 삼위의 통일성이 결국은 성부에게 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오리겐이 성령을 이성적 ‘정신’(그리스어로 nous)으로 정식화한 이후에,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와 사역을 설명하지 못했다. 최근에 현대물리학의 ‘역장’(field of force)의 개념을 하나님의 본질로써 하나님의 영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신학이 전개되고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는 말씀은 모든 물질적, 신체적 현상을 하나의 우주 역장의 현현으로 보는 현대 물리학의 관점과 유비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영의 역장이 실존적으로 현현한 것이 삼위일체가 된다. 하나님의 영은 한편으로는 삼위의 통일성으로서 비위격적 역장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본질의 삼위적 실존의 한 양태로서 위격을 가진 성령이기도 하다(판넨베르크, ‘조직신학’ II, 79-84 참고).

삼위로 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신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신학 작업은 아직 진행형이다. 다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의 믿음과 사랑을 보신다는 것이다. 삼위로 일체되신 하나님의 신비를 다 헤아려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영원히 미쁘신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안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롬 11:33~34).

기독교타임즈 webmaster@kmc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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